『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by 현목

저는 작년까지 크리티앙 보뱅(Christian Bobin)이란 작가를 전혀 들은 바도 없었습니다. 지난해에 우연히 ‘편집자K’라는 분이 유튜브에서 ‘2월엔 이 책!’을 소개한 것을 보았습니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품을 가지고 얘기를 했는데 흥미가 있어 예스24에서 『환희의 인간』 『그리움의 정원에서』 『작은 파티 드레스』를 주문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그는 1951년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크뢰조에서 태어났습니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로서 큰 사랑을 받았지만 문단과 거리를 두고 가톨릭 수도승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유명한 작가였으나 세상의 영화(榮華)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고독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작가로서 유명세를 타면 누구나 그 나라의 수도―여기서는 파리겠지만―에 가서 잘난 체 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입니다. 그는 2022년 71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책들은 페이지 수가 150페이지 정도의 소책자입니다. 말하자면 한 권의 시집과 비슷한 사이즈입니다. 제가 읽은 『작은 파티 드레스』도 124쪽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책자이고 주제는 책, 독서, 글쓰기 등이지만 한 권의 시집처럼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메타포’가 거의 1/3내지 1/4은 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이런 책을 ‘시적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수필 쓰기가 바로 이런 식의 책입니다. 나이가 있어 자신이 없지만 시간 나면 용기를 내서 베껴쓰기를 시도해 볼 요량(料量)입니다.


『작은 파티 드레스』는 9개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의 8개의 에세이는 ‘책’ ‘독서’ ‘글쓰기’에 대한 에세이이고 마지막 아홉 번째의 수필이 사랑에 대한 에세이였습니다. 잘은 모르긴 하지만 크리스티앙 보뱅이 사랑했던 지슬렌 마리옹에 대한 얘기가 아닌가 하는 억측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움의 정원』은 지슬렌 마리옹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에 대한 얘기가 주제입니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프로필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아도 그의 가족력이나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결혼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슬렌 마리옹은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이혼한 경력도 있고 아이도 셋이나 있는 걸로 나옵니다. 1979년에 보뱅이 처음으로 지슬렌을 만났고 그녀는 1995년에 뇌동맥류 파열로 40대 중반에 사망합니다. 그 둘이 사랑한 기간은 16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크리스티앙 보뱅의 매력에 빠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의 오랜 염원이었던 시적 수필의 전형(典型)을 보는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렇게 쓰고 싶었지만 능력이 안 되어 쓰지 못했던 것입니다. 보뱅의 책은 좀 과장되게 말하면 한 권의 산문 시집에 해당된다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뱅의 글의 위대함이라고 할까, 특징이랄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문장을 설명이나 진술이 아니라 거의 다 구체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보뱅은 이렇게 씁니다. ‘기아의 저편에는 달콤한 환락이 자리한다.’ 이것을 보통의 사람이 진술로 쓴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기아에는 환락이 따른다.’라고 말입니다. 보뱅이 저의 관심을 끄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의 상상력입니다. 칸트처럼 논리가 아니라 상상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메타포’로 이끌어 가는 그의 문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시인입니다. 따라서 그의 책을 읽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보뱅이 어떻게 ‘메타포’를 구사했는지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책과 독서와 글쓰기에 관한 글들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버리고 대신 몽상의 영(靈)과 불길 같은 바람을 들여놓는다.

∙당신 안에 자리한 책을 뿌리로 직접 가 닿는 독서. 하나의 문장이 살 속 깊은 곳을 공략 하는 독서.

∙내가 책을 읽는 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 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예요. 위 안을 받고자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그녀는 글을 쓴다. 온갖 색깔의 노트에다. 온갖 피로 만들어진 잉크로.

∙그녀가 글을 쓰는 것은 그 삶을 가지기 위해서이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 신 혹은 사물들을 피난처로 삼는 삶이다. 그곳에는 무(無)가 차고 넘친다.


일곱 번째 에세이의 제목이 ‘가라 요나, 내가 널 기다린다’입니다. 요나는 기원전 8세기 경에 활동한 이스라엘의 예언자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가서 이교도를 개종시키라는 명령을 내리자 겁이 나서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물고기가 요나를 삼켜 사흘날 사흘밤을 물고기 배속에 있다가 나와 니네베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런 성경의 얘기가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뱅이 성경에 대해 쓴 글들이 제게는 감동적이었습니다.


‘성서를 읽는다는 건 당신의 독서의 체험에서, 폐허 속에 묻힌 이 삶에서, 절정의 순간을 의미한다. .. 그 대척점에 신문 읽기가 있다. 그것은 움직임이 없는 어둡고 굼끈 독서이다. 반면에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흰빛이 차고 넘치는 경험이다. 당신이 신문을 빠짐없이 낱낱이 읽을 수 있는 건 그 안에 본질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 책(성서)을 펴고 책장 속 어딘가를 짚으면 손가락 밑에는 물고기나 양 한 마리, 야자수 한 그루가 있다. 책을 읽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삶으로부터 삶 자체로, 단순한 현재에서 완료된 현재로 건너간다. .. 성서 속에는 신이 있다. 아니, 신밖에 없다. 그는 쉴새 없이 이야기한다. 말과 무언(無言)으로, 벼락으로, 청량한 사월 아침의 산들바람으로, 속삭이는 밀 이삭이나 구슬픈 소 울음 소리로, 거품이 이는 파도나 타오르는 불길로, 세상의 온갖 물질로 이야기한다. ..성서에선 바람이 바람에게 말한다. 바람은 너무 혼자이지 않으려고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한 목소리의 호수 위로 부는 신의 바람, 물 위를 걷는 바람, 집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다. 바람이신 하느님, 하느님이신 숨결.’


그런데 왜 저는 크리스티앙 보뱅처럼 글을 쓰지 못할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제가 쓴 책 『의사 할배가 들려주는 조금 다른 글쓰기』에서 제가 말했던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의 편지 7’에서 ‘주어가 주어지면 일단 1,2초 멈추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다시 잠깐 복습을 해보자. 분석명제는 주어가 주어지면 주어의 속성을 가진 동사를 가지고 문장을 완성한다. 따라서 그 문장은 논리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삼각형은 세 변을 가졌다”는 말은 당연하다.


반면 종합명제는 주어의 속성이 아닌 것을 가지고 동사로 사용한다. 그 문장은 논리적이지 않다. 따라서 그 문장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삼각형은 초록색을 가졌다”는 문장은 상상이 들어갔으므로 누구에게나 옳은 판단은 아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수필을 쓴답시고 자기가 경험한 것을 쓴다면 90퍼센트 이상의 대부분은 그저 논리적인 분석명제의 문장을 씁니다. 이것은 읽는 사람도 인과관계가 맞으므로 아무 저항도 없이 머리에 그대로 들어옵니다. 내용을 힘들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글을 좋아합니다. 글은 이렇게 쉽게 써야 한다고. 그러나 이렇게 쓰면 크리스티앙 보뱅이 쓰는 시적 수필은 쓸 수 없습니다. 주어가 주어지면 1,2초 멈추고 주어의 속성이 아닌 동사를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메타포’의 문장이 되고 시적 상상력을 일으키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연습입니다. 수필을 쓸 때도 신경을 써야겠지만 평소의 생활 속에서도 눈 앞에 있는 풍경을 가지고 ‘종합명제’ 만드는 연습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게 하여 나중에는 별로 신경을 안 써도 술술 나오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밤에 누워 자려고 전등을 껐다고 합시다. 그러면 보통은 이렇게 씁니다. ‘어둠이 방안에 가득했다‘ 여기서 분석명제로 바로 가지 말고 ’어둠’이라는 주어에서 1,2초 쉬었다가, 이렇게 써보는 것입니다. ‘어둠은 보이지 않는 발을 내려서 방안의 사물을 가만히 안았다.’ 좋은 ‘메타포’ 문장인지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문장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크리스티앙 보뱅도 그랬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장을 이렇게 쓰면 너무 난해해져서 가독력(可讀力)이 떨어지기 때문에 적당히 분석명제인 진술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크리티앙 보뱅을 만난 것은 어쩌면 제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마음 속으로 흠모하면서 따라야 스승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지요. 그러나 이런 유의 글은 사람에 따라 호오(好惡)가 갈리는 것도 인정을 해야겠지만 저로서는 좋아하는 ‘시적 수필’의 본보기가 될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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