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들이 외출하고 집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나에게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아이코야 너는 좋겠다. 네가 무슨 걱정이 있겠냐. 우리가 주는 밥을 꼬박꼬박 먹으면 되고. 너를 누가 해코지 하는 놈들이 있냐. 우리처럼 온갖 근심거리를 달고 사는 것도 아니고… 라고 말을 하지만 그건 나를 피상적으로만 본 겁니다. 물론 나는 우리 주인님들처럼 생존경쟁을 하면서 밥벌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들의 주장이 일견 타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인님도 자주 말하듯이 산다는 것이 육신만을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이 있는 겁니다. 물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주인님 레벨의 인간과 나를 비교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건 압니다만 그래도 인격이 있듯이 견격(犬格)도 있는 겁니다. 나의 정신적인 고독과 고뇌를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써주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내가 인간으로 치면 아이큐 50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지만 인간의 격이 아이큐 다소에 달린 것이 아니듯이 나도 그런 것 아닙니까.
내가 풍파 없이 사는 것 같애도 나에게는 천적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혹시 삐꾸가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걔는 나의 의식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나와 그와는 원체 지향하는 바가 달라서 서로가 아예 안중에도 없으니 걔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집의 손자들입니다. 내가 그 손자들을 생각만 해도 살이 떨립니다. 그렇다고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내가 부들부들 떠는 게 아니라 걔들이 집에 들어오면 나의 모든 삶의 리듬이 깨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나의 지위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립니다. 주인님은 표변하여 나 같은 존재는 있는지 없는지 상대도 안 합니다. 그때처럼 내가 서러운 적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손자들만 안고 금방이라도 눈에 넣기라도 할 듯이 쪽쪽 빨아대는데 내가 보기에는 꼴불견입니다. 내가 시기 질투가 나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도 나에 대한 의리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나를 찬밥 신세로 대하는지 나는 주인님의 인격을 의심할 정도라니까요.
손자들은 이제 일곱 살, 다섯 살인데 내가 봐도 귀엽기는 하데요. 하지만 엄연히 나와는 라이벌 관계니까 그런 값싼 동정심을 내가 베풀 처지가 되지는 않습니다. 얘들이 맹랑한 것이 나를 견격을 가진 개로 취급하지 않고 자기들이 갖고 노는 또봇 정도로 여기는 데는 내가 환장을 한다니까요. 처음에는 무서워서 내 곁에 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더니 어느새 내 머리에 손을 하나 얹었나 싶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장난감처럼 자기들 품에 안고서 뒹굽니다. 나야 싫죠. 주인님이 그런다면 내가 얼마든지 어리광을 부리면서 꼬리를 흔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얘들은 어리잖아요. 내가 걔들과 맞먹을 수는 없죠. 나는 걔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어엿이 집안에서 랭킹 이위였는데 말입니다.
나로서는 고난의 길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인내와 기다림입니다. 걔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짖지 않고 피합니다. 그들과 일대일로 싸우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보다 걔들이 분명히 빽이 있으니까 나를 향해 반격을 해 올 것인데 그게 사실 나는 두렵죠. 그러니 뭐가 무서워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바로 제 짝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도 걔들과는 무슨 철천지 원수진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 나의 분수를 알기에 나는 안빈낙도(安貧樂道)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정도의 눈치는 제게도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밥숟가락을 얹고 살아가려면 내게도 처세술이 필요한 겁니다. 손자들이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면서 나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기약합니다. 세상이 새옹지마(塞翁之馬)라 내게도 기회는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