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조카 백일잔치에 다녀왔다. 생글생글 상큼하게도 웃으며 금귤보다 작은 주먹을 허우적대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게 하였다.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길 기원했다.
한편으로는 이 아이가 이 순간을 어떻게 남기게 될까 궁금했다. 먼 훗날 지금을 기억할 수 있을까. 요새는 간단히 영상을 남길 수 있으니, 화면 안의 자신이 ‘파닥파닥’하는 것을 보며 “그래, 그랬었지.” 하게 될는지.
아기의 시야는 뿌옇다고 하던데, ‘그날은 참 연푸른 빛이었어.’ 또는 ‘간질간질 따스했던 날이야.’ 하며 하얀 마음 위에 감각을 칠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기에게 손가락을 내밀면 꽉 잡는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놓지 않으려 한다. ‘기억의 시작’은 그 작은 손아귀와 닮았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놓고 싶지 않은 무언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놓아주지 못한 장면이 아슬아슬하게 서려 내 안 어딘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엄마가 아프다. 그것은 내 최초의 기억이다.
다섯 혹은 여섯 살쯤 되었을까. 동생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엄마와 둘이 손을 잡고 걸었다. 엄마는 눈물 나리만큼 젊었고 향기로웠다. 긴 원피스 치마를 입었는데, 그 색은 기억나지 않는다. 발걸음이 가벼웠으므로 노랑이었다고 하자. 샛노란 빛을 내는 엄마는 내 손을 잡고 행진했다.
빨간 공중전화 부스로 향했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이 지나다녔는데 부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한 발짝 남겨놓고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그만, 그녀는 발이 걸려 넘어졌다. 엄마의 정강이가 공중전화 부스 입구에 무겁게 부딪혔다.
순간 천둥이라도 친 것인지, 내게 들렸던 굉음이 선명하다. 엄마의 다리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심장이 요동했다. 험하게 요동했다. 공중전화 부스 아래로 빨간 피가 비처럼 내렸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고통스러웠으리라. 하지만 그녀의 손은 작은 아들의 손과 연결되어 있었다. 엄마는 이내 그 조그마한 생명체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보았으리라. 제가 아픈 것도 아니면서 앙앙 서럽게도 우는 아이. 그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엄마는 괜찮아.”
웃음을 보이셨다. 어찌나 환했던지 구름 뒤의 해가 다시 고개를 내민 것 같았다. 그 웃음으로 무너졌던 세상이 서서히 복구되기 시작했다. 구급차가 온 것도 아니었는데, 한마디 말과 웃음으로 그날의 색이 되돌아왔다. 우주는 다시 샛노란 빛을 뿜어내는 공간이 되었다.
이후에 어떻게 사건이 진행되었는지 모른다. 다만, 엄마의 아픔이란 이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는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따뜻한 미소가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
수십 년이 흐른 어느 봄, 엄마는 쓰러졌다.
폐암 4기였다. 유방암도 발견되었다. 암세포가 뇌로 전이되었고 뇌에 종양 십여 개가 생겨 그것 때문에 쓰러졌다. 지역 대학병원의 의사는 서둘러 말했다. 여기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며 치료가 의미가 없다고, 서울의 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서울에서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고통이 길어지자 살이 많이 빠지고 몸의 힘도 새어나갔다. 빛을 많이 잃으셨다. 그래도 아직 발하는 순간이 있었다. 주름지고 흰 머리 되어도, 아들에게는 때때로 젊은 엄마의 노란 원피스 같던 빛이 보이곤 했다.
삐쩍 마른 몸으로 치료받던 어느 날, 전화기 건너로 전해지는 목소리가 더 야위어 보인 어느 날. 몸은 어떤지 좀 괜찮은지 물으니, 요 며칠 코피가 난다고 했다. 손톱이 흔들려서 손가락으로부터 떨어지려 한다고 했다. 발가락이 크게 부었다고 했다.
마침내, 엄마는 아프다고 했다. 희미해지는 목소리로 아프다고 했다. 나는 많이 자랐기에 세상이 무너지는 대신, 한쪽 가슴 정도만 슬며시 내려앉았다. 전화기를 고쳐잡고 엄마의 말을 되돌려 주었다.
“엄마는 괜찮을 거야.”
웃음을 보이었다. 나의 세상과 엄마의 세상이 무너지지 않게 꾹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