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을 만지는 버릇이 있다. 어렸을 때는 손톱으로 긁어서 피가 나기도 하였다. 세균에 감염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손가락 끝으로 살살 쓰다듬는다. 쏙 들어간 배꼽은 근원에 대한 향수이자 파고들고픈 안락함이다. 지문 인식하듯 살포시 올려놓으면 탯줄이라도 이어진 것처럼 뱃속 깊은 곳으로 전달되는 체온이 양수에서 유영하던 시절을 상상케 하였다. 기능을 상실하고 노출에 취약하기까지 한 배꼽을 만지는 행위만큼 과거지향적인 것도 없다.
이 버릇은 타인 앞에서 하지 못할 행동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면 거리낌 없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성인이 되어서도 배꼽을 만지는 내게 핀잔을 주는 엄마였다. 앞뒤로 ‘아이구’나 ‘쯧쯧’ 같은 추임새도 잊지 않았다. 엄마가 그렇게 낳았으니 엄마 탓이라고 대꾸하였다. 마음에 안 들면 환불하라고 엄마 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 다시 돌아갈래! 절규하면, 등짝 스매싱을 맞는 레퍼토리가 이어졌다.
소설 <데미안>의 불후의 구절처럼,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는데,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는데, 나는 깨어진 달걀 껍데기를 조심스레 뒷주머니에 숨겨 놓고는 만지작만지작 그 조각의 태초를 그리워하는 꼴이었다. 경계를 뚫고 나가기는커녕 안으로 함몰하기 좋아했다.
인생은 알 속의 알 속의 알 속의 알이라, 우리는 늘 처음 만나는 세상으로 내던져지는 작은 병아리다. 새로 등장한 벽이 두려워 차마 부리를 부딪지 못하던 나는 멀찌감치 물러서서 낯설고 불안한 세계를 흔들어줄 존재를 잠자코 기다리는 것이었다.
엄마에게 손을 맡기던 시절에는 사랑받는 느낌이 좋았다. 손톱을 깎자고 부르면 신나게 달려갔다. 일부러 엄살을 부렸다. 손톱이 잘릴 때 맞추어 비명을 지르면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위로했다. 그 모습은 작디작던 철없는 마음을 충만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엄마는 차츰 나의 손을 물렸고 나는 떼를 썼다. 홀로서기는 참 어렵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네 발로 세상을 딛고 일어나는데, 우리는 발이 두 개라 그런가, 누군가의 손을 잡아야 안정감을 느낀다. 엄마 손을 잡으면 우리 다리는 비로소 넷이 되었다.
그 잡은 손을 보내주기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두발자전거를 처음 탔을 때 나를 놓지 말라 목 놓아 우짖고, 혼자 버스에 승차하려면 차의 이마가 보이기도 전부터 땀에 젖은 동전을 손가락으로 달그락거려야 했다.
마침내 입학이라는 거대한 산이 찾아왔을 때,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거부의 뜻을 밝혔다. 학교에 가지 않겠노라, 이 연사 목 놓아 힘차게 외칩니다! 아랑곳없이 새 가방, 새 실내화, 새 연필을 준비한 엄마는 설렘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신년 특유의 들뜬 분위기에도 내 안 어딘가에는 두려움의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아마 엄마는 관찰력이 좋았나 보다. 아니면 내 입술이 지나치게 삐죽거렸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입학 전날 사전답사를 갔다. 걸어서 10분, 멀지 않은 거리였다. 이쪽으로 와서 저 길을 건너고 이렇게 저렇게 쭉 가면 도착이야, 쉽지? 당연히 쉽지 않았다. 나중에는 이 길을 혼자 걸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인국 주민이라도 된 것처럼 그 10분은 시간과 공간의 방을 건너는 은하의 거리였다. 엄마 없이 혼자 가다가 내 키보다 큰 콩벌레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다음날, 긴장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래도 한 번 가 봤다고 근심이 반 근 정도 덜어졌다. 수많은 꼬마가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모여들고 있었다. 양옆으로 세워진 담은 높디높았다. 정문에서 엄마를 멈춰 세웠다.
“엄마, 나 정말 가기 싫어.”
시간 지연 작전을 펼쳤다. 떼쓰기 전략과 한숨 발사도 불사했다. 내게 남은 인류애로 인해 ‘길바닥에 주저앉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강경 대치 중 한발 물러선 건 지나가는 아저씨가 ‘이놈!’ 해서가 아니었다.
“학교 안 가면 엄마 감옥 가야 해.”
“왜?”
“법이 그래. 어린이를 학교에 안 보내면 부모가 감옥 가서 살아야 해. 엄마 감옥 가면 좋겠어?”
감옥이라니. 쇠창살과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매서운 눈의 간수가 곤봉을 들고 서 있는 끔찍한 곳. 하지만 그 흉악성보다 주요했던 것은, 엄마가 옥살이하면 나는 엄마 없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를 감옥에 보낼 순 없었다.
어느새 혼자 등교하게 된 나는 매일 엄마의 배웅을 받았다. 문을 활짝 젖히고 점프해서 나가면 엄마의 목소리가 책가방에 달라붙었다.
“차 조심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는 잔소리는 점차 사그라들었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조언은 간헐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차 조심하라는 말은 하루도 빼먹지 않으셨다.
며칠에 한 번씩 연필을 깎아주셨다. 건너편에 엎드려 누운 나는 양손에 턱을 괴고 그 소리에 젖어 들었다. 신문지 위로 떨어지던 나무의 머리칼을 보았다. 사각사각 울리는 연필 향을 맡았다. 연필깎이를 사 주셨지만, 엄마의 연필 칼이 더 좋았다.
학교 끝날 시간에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학교로 오셨다. 철부지 아들은, 일을 멈추고 학교로 찾아오던 엄마의 그 많은 발걸음은 기억하지 못하고, 단 하루 비 맞으며 하교한 날을 가슴에 새겼다. 스스로 손톱을 깎게 되었지만 삐뚤빼뚤한 모양은 정돈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차 조심’이 ‘운전 조심’으로 바뀔 즈음 연필 대신 펜을 썼다. 지울 수 없는 책임감이 따라왔다. 때로는 의식의 무게가 버거운가, 배꼽이 허전하지 않던 언제인지 모를 그 시절을 동경한다. 계절성 비염이라 코로 숨 쉬는 것보다 탯줄로 숨 쉬는 게 편했나 하는 생각도 한다. 사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안다. 그저 엄마와 함께였던 유년이 그리운 것이다. 어둠 속 병아리가 방향을 잃을 때, 밖에서는 품고 쓰다듬고 노크하는 존재가 있었다.
여전히 배꼽을 만진다. 아직도 나는 엄마가 필요하다. 감옥이 아니라도 엄마를 보내는 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