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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Oct 12. 2024

존중을 위한 고군분투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독서하기 딱 좋은 사춘기 5 <아름다운 아이>와 함께

인간의 존엄은 

인간이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라는 것, 아니 그래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뭉클한 이유는 그 명제가 고귀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결코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리적 이성으로 아이가 어른만큼 존중받아야 하고 여자도 남자만큼 귀한 존재이고 흑인도 백인과 똑같은 사람이고 평민도 양반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을 느낄 줄 알며 비정규직도 정규직과 같은 '인간'이며 서울대를 나온 사람이나 고등학교밖에 못 나온 사람이나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견해는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할 때마다, 그런 선언들이 절절한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개가 아니다

라헐 판 코에이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을 보고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다른 이들이 주목한 것처럼 공주가 어떻네, 시녀가 어떻네, 화가의 위치기 어떻네 하는 데 주목하지 않고 공주 앞에 앉아 있는 개를 보았다. 혹시 저것은 개가 아니라 커다란 개의 가죽을 뒤집어쓴 작은 사람이 아닐까? 상상해 보 것이다. 그런 상상에서 이 소설은 탄생했다.


주인공 바르톨로메는 장애의 몸에도 불구하고 영특한 재능도 있고 맑은 영혼과 자존의 영성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못 볼 뿐이다. 내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많은 장애인들을 보면서 그 안에 숨겨진 영성은, 있으리라고 짐작조차 못하기도 한다. 그가 글자를 배우기 위해 애쓰는 장면, 특히 빨래바구니에 몸을 숨겨 수도사에게 글을 배우러 갈 수 있도록 형제들이 돕는 장면을 읽으며 '진정한 배움의 자세'에 대해 숙연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열망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에.

그렇게 애를 썼지만 결국 궁중에 들어가 공주의 어릿광대 노릇을 해야 했던 바르톨로메는 "나는 개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궁을 뛰쳐나온다. 바르톨로메를 개 취급하는 공주도 나쁘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장애인을 보고 에구, 불쌍해서 어쩌나, 저렇게 살 바에는 태어나지나 말지.. 하고 혀를 차는 할머니들도 좋은 사람들이라 말하기 어렵다.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나를 하찮은, 혹은 없는 존재로 여기는 태도이다. 그것에 저항하지 못하면 살아남을는지는 모르나 내 영혼은 존재감 없이 날아가고 말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정말 감동적인 장면은 그다음이다. 만약 바르톨로메가 '나를 개 취급 하지 말라. 장애인도 사람이다.라고 외치고 그쳤다면 이 이야기는 평범한 '장애인의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나는 개가 아니다, 공주도 개가 아니다, 그 누구도 개가 아니다!'라고 외친다. 바르톨로메의 영혼이 아름다운 이유는 거기 있다. 그래서 더욱 그는 당당한 사람이다. 우리가 어린 친구들에게 가르쳐야 할 존엄은 '너는 귀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누구도 널 무시할 수 없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너도, 남도, 누구나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고, 그렇게 서로 존중할 때야 진정한 '자존'이 보장받는 거라고 알려주는 일이다.

          

여기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그리고 여기 ‘존중’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R.J. 팔라시오가 쓴 <아름다운 아이>. 

<원더>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더 잘 알려진 이 책은 매우 두껍다. 하지만 사실은 초등학생용 책이다. 주인공 어기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문체가 경쾌해서 순식간에 읽을 수 있다.

주인공 오거스트(어기)는 안면 기형을 가져 늘 헬멧을 쓰고 다니는 아이다. 천성이 밝고 사교성도 좋지만 얼굴의 기형이 너무 심해 보는 사람들도 힘들어할 정도다. 새로운 학교에 전학을 가서 적응하고 친구를 사귀어가는 과정, 각종 사건 사고들이 펼쳐진다. 어기의 마음가짐도, 서술자의 필치도 모두 유쾌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괴롭고 끔찍한 사건이 없는 건 아니다. 예상할 수 있는 폭력들이 난무하지만 좋은 친구들과 함께 극복해 나간다.     


이 책이 아름다운 진짜 이유

이 책의 제목은 반어적이다.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마음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어찌 보면 너무나 PC한 제목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속편에 있다. 1편의 아름다운 아이는 누가 뭐래도 주인공 오거스트이겠으나 2편, 3편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아이'들은 모두 어기의 친구들, 특히나 2편의 줄리안은 어기를 괴롭히던 아이다. 그 아이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바라본다면?


학교폭력은 나쁜 게 맞다. 하지만 학교폭력은 못된 가해자 – 선량한 피해자의 단선구조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신문에 흔히 나오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단지 약하고 못생기고 가난하고 공부 못한다고 해서 끔찍한 폭력과 따돌림을 당하는 그런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런 구도일 때조차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하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학교폭력은 복잡하다

저자는 아마도 아이들 마음속에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잘못’을 저지르는지, 섬세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아이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벌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원래 벌이란 건 다시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고 내리는 거라면, 다시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원인 들여다 보기’, ‘가/피해자의 상처를 주게 된/상처받은 마음 살피기’, ‘원인과 마음의 상처 없애기’, ‘훈육으로 다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이끌기’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이 너무나 강퍅해지고 어린아이가 저지른 일이라 믿을 수 없는 끔찍한 폭력들이 난무하다 보니 나이가 어려도 강력하게 처벌하자는 소리가 높다. 그런 목소리들은 마치 ‘쓰레기는 쓰레기장으로 치워버리자’는 말처럼 들린다. 문제는, 사람은 그렇게 치워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아직 어린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들이 그렇게 된 원인의 절반 이상은 어른들의 책임이기도 하기에 더더욱. 학교폭력의 잦아진다고는 하지만 아주 극악한 사건들을 빼면 대부분의 사건들은 더 이상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바르게 클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들이다.

그렇게 아이와 어른들 모두가 함께 성찰할 수 있게 하기에 이 ‘아름다운’ 시리즈는 더욱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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