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하기 딱 좋은 사춘기 4 <유진과 유진>도 함께
픽사에서 나온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1편 맨 마지막 쿠키 영상에 사춘기 남학생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스포’가 될까 봐 구체적으로 말은 안 하련다. 직접 보시라.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별 생각이 없다. 아무 생각이 없고 격렬하게 아무 생각도 않는다.” 쯤 된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맘때 남학생들은 다 그런가? 오랫동안 남학생을 가르친 입장에서 “남학생들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라고 편들어 주고 싶지만.
소년은 어휘력이 짧다?
그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갑자기 뇌가 활성화되는지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나가면서 갑자기 어려운 단어들을 마구 쏟아낸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자아탐구가 필요한 시기라고.” “됐어, 어디서 묵비권을 행사하고 그래?” 오~, 중1인데 그런 언어를 구사한단 말이지? 돌아보면 머릿속에 축구와 게임밖에 없을 것 같은 아주 귀엽고 아주아주 개구쟁이처럼 생긴 친구가 그런 말을 한다. 남자 중학생은 단순하다, 소년들은 어휘력이 짧다, 남자애들은 생각이 없다, 이건 모두 편견이다!
<너도 하늘말나리야>를 4시간에 걸쳐 읽었다. 조용히 각자의 새 책을 두 손 고이 받잡고 읽기 시작할 때의 그 순정함은 거의 흰 장갑 끼고 규장각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꺼내드는 유생들이다.
“여러분, 두 손을 들어 보세요. 바지에 쓱쓱, 손바닥의 땀을 닦고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 봅시다. 내년에 후배들에게도 읽혀야 하니까요.” 하란다고 다 따라 한다. 짐짓 자기들도 조심스러운지 “선생님, 책 겉에 있는 띠지는 어떻게 해요?” “선생님, 쟤 책 접어요. 야, 그거 새 책이야아~.” 경건하다가 못해 난리부르스다.
남중생 25명을 30분 동안 몰두하게 만드는 책
소설에는 세 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희, 미르, 바우. 바우는 엄마가 돌아가신 충격 때문에 선택적 함구증을 앓고 있다. 소설 시작하자마자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그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용어가. 조용히 분위기 잡기 시작할 무렵에 누군가 속삭이듯, 누군가에게 묻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린다.
‘선택적 함구증이 뭐지?’
나 들으란 건가? 가서 설명해 줘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누군가 또 속삭이듯 설명해 준다.
‘그,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말하는 거야.’
그러자 여기저기서, 저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또 속삭이듯 말해주는 아이들.
‘말 못 하는 거야, 그거, 충격받아서.’
‘근데 가족이나 친한 사람한테는 말할 수 있어.’
얘들아, 다 들리거든?
보통 수업 시간 같으면 20분 간격으로 활동을 바꿔야 집중하는 중1 소년들이 30분 넘게 책에 몰두한다. 동화라고 해야 할 만큼 소설은 쉽고 재미있지만 문장도 구성도 단순하지만은 않다. 특히 소희의 마음이 자꾸 지핀다. 이야기는 미르 사건 중심으로 가지만 요즘 흔히 간과하는 청소년들의 ‘정신적 성장’ 부분을 소희를 통해 보여주는 것 같다.
사랑보다, 우정보다 깊은 믿음
바우와 소희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깊은 '신뢰감'이다. 청소년기에 이런 정신적 교감은 매우 중요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고 있을 것 같은 신뢰감. 말하지 않아도 읽히는 마음...... 미르 엄마와 바우 아빠의 교감도 눈에 띈다. 아이들 눈으로 볼 때 어른들의 우정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두 어른이 혹시 서로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오해가 있었지만 미르나 바우가 정신적으로 성장하면서 어른들에 대한 이해도 확장된다. 두 어른은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과 낮고 겸손한 삶의 철학으로 친구가 된다. 신영복 선생이 말했던가, 입장의 동일함이 소중하다고. 동지란 그런 것이다. 동지는, 연인이나 친구와는 다른, 매우 깊고 진한 관계의 이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좋은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인 것 같다. 성장소설이 빠지기 쉬운 ‘위악(거짓으로 ‘쎈’ 척, 못된 척하는 것)’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재미있고, 훈계를 하려 들지 않지만 지향을 보여주는 좋은 성장소설이다.
좋은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
45분 수업 3시간 동안 책을 읽는데 매시간 10분 정도 남기고 간략히 그날 읽은 내용을 정리하는 시간을 두었다. 내가 기대한 모습은 열심히 책을 읽은 만큼 조용히 글을 쓰는 모습이었지만 이때다 싶게 아이들은 토론을 벌인다.
‘(소곤대며) 야, 너 몇 쪽까지 읽었어?’
‘126쪽’
‘와, 진짜? 난 100쪽도 못 읽었는데?’
‘근데 말이야, 소희는 바우한테 왜 그렇게 말했을까?’
‘어, 아냐, 그건 둘 사이에 오해가 생긴 거구, 장미꽃은 말이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 학생들은 그날 읽은 만큼 자연스럽게 ‘독서하고 대화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궁금하니까~.
책이 재미있으면 억지로가 아니어도 아이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독후감도 그렇지 않을까? 이야기를 간직하고 싶어서, 이 감동 어딘가에 나누고 싶어서, 즉 자기 안에서 넘치는 이야기를 주체할 수 없어서 일기장에 적는다면 그게 최고의 독후감이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독후감에는 ‘진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공감이 많이 됐다.’ ‘바우, 소희, 미르의 우정이 부러웠다’는 내용이 많았다. 내가 ‘아이들이 쓴 독후감에 대한 독후감(나의 감상)’을 들려주면서 “여러분, 진짜 재밌게 읽었다는 글이 많네요.” 했더니 많은 아이들이 입을 모아 “진~ 짜 재미있었어요. <어린 왕자>는 좀 어려웠는데 이 책은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한다. 음~, 이금이 선생님, 감사해요~.
<소희의 방>, 속편에서 조금은 행복해진 소희를 만나다
<소희의 방>은 그 후속 편이다. 중학생이 된 소희, 안 그래도 어른스러웠던 소희가 성장하는 모습에, 사춘기 소녀의 깊은 상념들에 나의 소녀 감성까지 더해져 나는 <너도 하늘말나리야>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은... 소희가 엄마와 함께 살게 되면서 자신의 방과 경제적 풍요와 안락, 새로운 문화적 혜택을 받는 신데렐라적 변화에 쾌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해피엔딩, 행복한 인과응보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욕구... 소희야, 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단다. 행복해질 자격이.
문학적 품격이 있는 청소년 소설 <유진과 유진>
청소년 소설 분야에서도 ‘고전’이라는 평을 받을 만한 베스트셀러들이 많이 있지만 특히 이금이 작품은 매력적이고 특히 문학적 품격이 있다. 소설 <너도 하늘말나리야>는 이미 검증을 마쳐 교과서에도 실렸지만 <유진과 유진>도 만만찮게 훌륭하다. 소제목만 봐도 그냥 시적이다.
- 꽃이 진 자리에 돋는 파란 새 잎은 꽃의 눈물
- 자꾸만 나를 안다고 한다
- 나의 삶은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추락하는 외줄 타기 같다
-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지하의 이카로스(맨 마지막 장의 제목은 ‘바다의 이카로스’이다)
......
어렸을 때 성추행을 당했지만 억지로 기억을 지워버린 ‘작은 유진’과, 가족들의 도움으로 건강하게 상처를 극복한 ‘큰 유진’ 두 여자아이 이야기다. 상처를 지우는 방법은 무작정 덮는 것이 아니라는 심오한 주제를 담고 있다. 작은 유진의 아픈 상처는 큰 유진으로 인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서야 비로소 조금씩 치유가 된다. 성폭력의 아픔이 가장 가까이에서 위로받았어야 하는 가족에게 오히려 외면당한다는 설정은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떠올린다.
치마 속을 들여다보려던 그 소년들
꽤 오래전 성폭력 문제로 선도위원회를 열어야 했던 아이가 있었다. 당시 겨우 중1이었던 그 소년은 방과후수업에서 강사 선생님 치마 속을 휴대폰으로 찍었단다. 특히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친구들에게 100원씩 받고 보여주기까지 해서 더 심각한 사안이었다.
선도위원회에 나온 학부모님은 처참할 정도로 부끄러워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춘기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무지한 부모님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 나는 아버지와 아이에게 각각 과제를 하나씩 안겨주었다.
대화와 독서로 왜곡된 성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면
“아버님, 어느 하루 일찍 퇴근하셔서 00이와 함께 단둘이 치킨집에 가세요. 아이랑 한 시간 이상 이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눠 보세요. 그리고 그렇게 나눈 대화에 대해 편지를 써서 아이에게 건네주시고요.” 학생의 아버님은 진심을 다해 그 과제를 수행하셨다.
그리고 그 아이는 따로 불러서 이 책 <유진과 유진>을 건네주었다. 책을 다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 입장에서 그 아픔을 공감해 보라는 의미이다. 그가 대학생이 되어 찾아온 후에도 우리는 차마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눈빛으로나마, 아픔을 딛고 반성을 딛고 잘 커달라는 당부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