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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Oct 03. 2024

<어린 왕자>만큼 아름다운 우화 <연어>

독서하기 딱 좋은 사춘기 2

우리에겐 안도현의 <연어>가 있다

나는 이 책에게 쌩떽쥐뻬리의 <어린 왕자> 만큼의 점수를 주고 싶다. 어린 왕자에 비해 너무 교훈적이라고 비판한다면 할 수 없다. 그것이 교훈일지라도 삶을 호도하지 않고 이렇게 힘을 주는 교훈을 어디 가서 쉽게 얻을 수 있으랴.     

이 책은 쉽고 재미있고, 얻을 게 있고 아름답다. 책이 가지고 있어야 할 미덕들을 다 가지고 있다. 게다가 짧기까지. 그래서 책 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중학생들에게 아주 많이 권한다. 이 책을 통해 독서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간 나의 아이들이 아주 많다는 일도 참 고마운 일이다.      


이겨내는 힘, 올곧은 마음도 유전된다면

일찍이 가수 강산에 씨가 연어의 생태를 가지고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란 아름다운 노래로 만들었지만 그걸 '이야기'로 만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고 보면 안도현 시인은 누구나 익숙하게 접하는 것들, 그것들에 대한 흔히 할 수 있는 상념으로 쉽지만 가슴을 툭 치는 시와 글을 쓴다. <너에게 묻는다>에서는 연탄재로, <스며드는 것>에서는 간장게장으로, 그리고 <연어>에서 연어의 모천회귀를 놓고 시적 상념을 끌어낸다.

그런 안도현 시인에 대한 믿음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새끼를 품은 어미 게의 입장에서, 또 어떻게 해서든 처음 태어났던 강으로 거슬러 올라 다음 생명을 낳으려 애쓰는 연어의 입장에서 그 생을 바라본다는 건, 게다가 그걸 아름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건, 그러니까 우리에게 안도현이 있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직업적으로 학생들에게 읽힐 만한 책을 발견할 때 마치 보물을 캐낸 것처럼 희열을 느끼는데(여기 소개하는 책들은 대부분 그런 보물책들이다) 이 책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게다가 얇지 않은가! 선물하기도 얼마나 좋은지...


사람들이 연어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편안한 물길을 애써 버리고 폭포를 거슬러 올라갈 길을 선택하면서 은빛 연어가 한 말을 자주 인용한다. '우리가 쉬운 길을 택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새끼들도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할 것이고, 곧 거기에 익숙해지고 말 거야.... 우리들이 지금, 여기서 보내고 있는 한순간, 한순간이 먼 훗날 우리 새끼들의 뼈와 살이 되고 옹골진 삶이 되는 건 아닐까?'     

고난을 이겨내는 힘과 강인한 의지, 진지한 삶의 태도도 유전이 된다고 믿고 싶다. 그렇기만 하다면 나 더 열심히 살아 내 아이들과 손자들에게 이 삶의 가볍지 아니한 가치를 고스란히 알아챌 수 있는 능력까지도 물려주고 싶다.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열심히 살아보자고 말한다.         


그리고 아, 영원한 쌩떽쥐뻬리의 <어린 왕자>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은 어린이일까, 소년일까? 그들은 귀여울까, 징그러울까? 순수할까, 막돼먹었을까?

사춘기, 특히 중학교 시절은 참 애매하고 모호한 시기이지만 그중에서도 중1은 특히나 더 그런 것 같다. 그들을 위해 학교에서 <어린 왕자> 30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개정된 교육과정에서는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권하고 있다. 아예 한 학급 인원 수 만큼 책을 구입했다. 그것도 황현산 선생이 번역한 것으로! 우리나라 불문학의 대가이며 뛰어난 수필가인 황선생의 책을 학생들에게 읽힐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선생님, 하늘나라에서 영면하소서.     


어린 왕자는 외계인

여러 해 전 <어린 왕자>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읽었어요.”라고 말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어렵지 않았니?” 물을 수밖에. 동화라고? <어린 왕자>가? 물론 줄거리만 추리면 그렇게 게 보일지도 모른다. 이 책이 고전인 이유는 다양한 연령대에, 다양한 처지에 따라 그저 동화로도, 우화로도, 판타지로도 철학책으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린 왕자>를 오래오래 여러 번 읽는지도 모르겠다.


"한 비행사가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해서 어린 소년 하나를 만난다. 자기는 먼 별나라에서 왔단다, 사랑하는 장미꽃이랑 싸워서. 오면서 여러 별들을 여행했는데 제대로 된 인간이 없었다나. 그러면서 일곱 번째 별 지구를 보고 이 별은 너무 크다고, 해지는 거 보는 걸 좋아하는데 자기 별처럼 의자를 당겨가며 자주자주 볼 수 없어서 ‘짱난다’고, 한다. 즉 ‘어린 왕자’는 외계인인 거다!

요 ‘어린노무자슥(하긴 우주에서 몇십, 혹은 몇 백 광년을 날아오느라 외모만 동안이지 실제로는 몇 천 살 혹은 몇 만 살일지도 모른다만)’은 겁도 없이, 그리고 헬멧도 없이 우주여행을 하다가 지구에 오지만 인간이 아닌 사막여우와 금빛 독사에게서 우주적 깨달음을 얻는다. 가령, 누군가를 사랑하고 길들이는 일이 얼마나 설레고 아름다운 일인지, 세상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존재를 갖는다는 일이 얼마나 뭉클한 일인지, 수천 송이의 장미꽃 중에서 나만의 장미를 사랑한다는 일의 의미가 어떠한지, 정말 아름답고 귀한 것은 사막의 우물처럼 어딘가에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든지, 그런 거 말이다.     


어린 왕자에게 죽음이란

심지어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서 얻은 깨달음으로 자기가 얼마나 장미꽃을 사랑하고 있는지 새삼 느끼고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데, 올 때처럼 철새의 힘을 빌어서는 가지 못하고 더 빨리 가는 방법을 찾아 사막에서 만난 뱀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의연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 하지만 아냐, 내 별로 돌아가는 거얌.’, 요렇게. 인간이 죽음을 맞이할 때 이런 자세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은 우리 모두는 자기가 떠나왔던 별들로 돌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왔다는 사실을 까먹어서 죽으면 끝인 줄 알고 두려워하는 건지도... 어른들이 이 대목을 읽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를 돌아보면 좋겠다.     


하여간, 그리하여 우리 중1 소년들, 열네 살 인생을 살아 소설 속 어린 왕자보다 쪼끔 더 나이를 먹은 내 제자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애초에 ‘상징’을 배우면서, 책 속에서 상징을 찾아보자고 해서 그런가, 아이들은 이 책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 <어린 왕자>가 달리 고전인 줄 알았니? 고전, 너네 그거 날로 먹는 거 아니다. 원래 고전은 재미도 있지만 뭔가 재미 말고도 숨겨놓은 뭔가가 더 있어 보여야 고전이 된단다. 너, 신비주의라고 들어봤지? 설명할 순 없지만 뭔가 더 ‘있어 보이는 거’, 그게 신비주의야.      


어린 왕자처럼 아름다운 눈빛의 소년들

어린 왕자의 그 ‘뭔가’를 난 좀 알 것 같다. 그게 뭔지 얘기해 달라고? 아니, 아니, 그건 스스로 깨달아야지. 나도 그거 깨닫는 데 50년이 넘게 걸렸거든?"


“어쩌면 ‘어린 왕자’는 소설의 서술자인 ‘불시착한 비행사 – 아마도 작가인 생텍쥐페리 자신이겠지? 그도 원래 비행사이기도 했으니 - ’가 어렸을 때 잃어버린 ‘자아’ 일지도 몰라.”라고 말하자 몇몇 학생이 마치 광야에서 고행을 하다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 같은 표정을 짓는다. 고작 14년을 살았지만 생각이 깊은 소년들이 있는 거다. 그런 깨달음의 공감대가 있어 '함께 읽는' 즐거움이 있다.

뱀에게 물려 사막에서 스러지는 어린 왕자의 뒷모습을 ‘팝업북’으로 보여줄 때 아련한 눈빛을 한 몇몇 소년들아, 너희들은 심지어 ‘죽음’=‘내 별나라로 돌아감’이라는 비유를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단다. 비록 너희들이 그 수업을 마치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내달릴지라도 나는 너희 안의 그 고즈넉하고 철학적인 소년미를 사랑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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