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하기 딱 좋은 사춘기 12
이 편의 제목을 달리 붙여야 할 것 같다. 사실은 읽은 지 꽤 오래된 두 편의 소설을 사후 세계와 마법의 세계라는 판타지적 요소 때문에 묶어 다루려 ‘인간계가 아닌 다른 세상’ 어쩌구 제목을 붙였더랬다. 10화 판타지가 아이들을 구한다에서처럼 또 다른 판타지 소설 이야기를 더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어본 소설은 또 다르게 읽힌다.
문체도 다르고 주제의식은 물론 소설의 방향성이며 분위기도 전혀 다른 두 소설이지만 공통적인 것은 '음식' 이야기이다. 그러고 보니 음식 = 영혼, 이런 등식으로 흔히는 따뜻한 음식으로 위로를 전하는 부류의 이야기들이 제법 많아졌다. 이 두 소설은 조금 다르다. <구미호 식당>은 크림말랑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음식으로 살아생전 못다 한 인연을 찾아 나서고 <위저드 베이커리>는 치명적인 유혹의, 마법의 빵들을 소개한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음식들은 결코 위로의 대체물들이 아니다.
<구미호 식당> 당신에게 49일이 주어진다면
주인공이 바로 죽고 시작하는 청소년 소설이다. 그에게는 완전히 저승으로 가기 전 49일이 주어진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오래전 드라마 <49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49재도 떠올랐다. 영영 이별 영 이별, 그전까지 이승의 사람들은 죽은 이에 대한 이런저런 정리를 해야 한다. 물건을 정리하며 마음의 정리도 하라고 '49일'의 근거를 생각해 본다. 혼이 이 땅을 아직 벗어나지 않았다 하니 남아 그를 그리워하는 산 자들은 혹여 그 혼을 붙잡을 수 없을까, 만날 수 없을까, 되돌릴 수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의 베스트셀러 <구미호 식당>이 탄생할 수밖에. 이승을 아직 떠나지 않은 우리의 고작 열다섯 살 먹은 망자는 여우의 제안으로 사람의 모습을 하고 49일을 지낸다. 식당을 운영하며.
모든 불행을 다 가진 주인공들
죽은 소년 수찬이는 불행의 정점에서 사망했다. 부모도 없고 길러준 할머니는 자기를 구박하고 친 형도 아닌 형은 양아치에, 친구도 없다. 죽은 후 여우가 49일을 살게 했지만 만나고 싶은 사람도, 풀어야 할 회포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기 전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 죽기 전에 알았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수찬이처럼, 불행을 겹으로 둘러 덮고 태어나고 살아가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다. 그래도 자기 안의 어떤 에너지로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중간에 그만 손을 놓아버리고 학교를 그만두고 더 불행해지거나 범죄의 길로 가는 아이들도 많이 보았다. 수찬이는 얼마나 외로운 영혼인가. 살아생전의 삶에 대한 미련조차 없다니.
어쩌면 이것은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해'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수찬이와 함께 구미호 식당을 운영하던 '아저씨'는 주연급이니 그에 해당하는 훈훈하고 가슴 저린 사연이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수찬이 사연과 교차되면서 하나씩 비밀을 풀어가는 재미가 있었는데 주제는 의외다. 가슴 저린 첫사랑을 한 번만 만나보고 저승으로 떠나겠소, 이런 순애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청소년 소설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손색이 없는 소설이다. 사실은... 끝까지 읽지는 않았지만 2편도 몹시 재미있었다. 죽음의 세계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거쳐야 할 오디션 이야기. 내가 2편을 끝까지 읽지 않은 이유는 다른 읽어야 할 것들,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오직 학생들에게 읽힐 책만 고르는 과정에 '속편은 제외한다'는 나 나름의 원칙 때문이었던 것이고, 사실은 재미있어서 읽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러니 다른 분들은 꼭 2,3편도 읽어보시라 권한다.
이 음험한 이름을 보라 <위저드 베이커리>
만약 부모가 이혼을 하고 새어머니가 들어오고, 형제니 잘 지내보라고 한 어린 (의붓) 동생이 자기를 모함하는 그런 처지에 놓인다면 어떨까? 그보다 더 이전에는 엄마에게 버려지고 결국 엄마 스스로 주인공을 떠나는 그런 고통스러운 성장과정이 있는 소년이 집을 뛰쳐나와 길거리에서 만난 마법의 빵집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청소년 소설을 쓰는 작가는 자기가 탄생시킨 주인공 청소년들을 극단적인 상황에 몰아넣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하는. 하지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학생 이야기가 재미있을 리 없다. 아니 사실 현실에는 이미 소설보다 잔인한 상황과 사건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게 안쓰러운 인물들이 등장할 밖에.
구병모의 독특한 문학 세계
청소년 소설이라기엔 결코 쉽지 않고 편안하지도 않으며 해피엔딩이라고만 할 수도 없고 캐릭터들도 칙칙한 구병모의 소설은 어쩌다 50만 부 초대형 걸작이 되었을까. 이건 좀 샛길 이야기인데, 한강 작가의 책을 살펴보면서도 그렇고 창비가 장사를 참 잘한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청소년 소설을 쌓아놓고 보니 창비 것이 많았다. 좋은 출판사라 좋은 작품을 보는 눈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마케팅의 힘일까. 거기에 혐의를 전혀 안 느끼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은 그렇게까지는 아닌데?' 하는 의심이 드는 작품들은 거의 없으므로 용서해 준다(그런 작품이 있냐고? 꽤 많다. 최근에 나온 무슨 백화점/세탁소 어쩌구 하는 작품들 중에는 저 정도까지 팔릴 만한 작품은 아닌 것들이 꽤 있었다).
구병모 소설은 그 엄청난 서사의 힘이 아니었다면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좀 어려울 수 있다. 문체가 강력하다. 우린 이런 걸 두고 '필력이 있다.'라고 말하지만 그게 재미있는 거랑은 좀 다르다. 그럼에도 <위저드 베이커리>는 청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인 서사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마법의 빵이라니! 각종 마법이 유치하지 않게 작동하는 그런 이야기는 세상에 몇 되지 않는다. 저주를 걸고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시간을 돌리기도 하는 그런 마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마법이 있다 해도 소년의 죽은 엄마를 살려내지도 못하고 쓰레기 같은 아버지를 좋은 아버지로 만들지도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누명은 벗을 수 있, 아니 뒤집어쓰지 않을 수 있다. 그 정도만이라도 좋다. 신데렐라가 갑자기 왕비가 되지 않아도 내 존재의 귀함은 훼손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어려운 소설을 학생들에게 권할 수 있다. 그의 진중한 문투를 견뎌낼 만큼 스토리는 흥미진진하므로 결코 "쌔앰~ 재미없어요~."소리는 들을 일 없으리라. 아이들은 괜찮다. 잔인한 이야기 싫어하는 나야말로 소설 속 사건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괴로웠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