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무지하게 바쁜 업무를 마무리하고, 저녁에는 도장에 다녀왔다. 품새 도중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엉뚱한 동작을 할 때가 있고, 잡다가 실수를 하는 일이 있어 불안했다. 사범님과 품새를 훑고 미트 발차기 연습도 한번 해 보았다.
새벽에 출발해야 했기에 일찍 잠들려고 했는데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 12시를 넘겼다. 자다 깨면 아침인데 설레었는지 걱정이 되었는지 네 시 몇 분부터 계속 깨다 말다 해서 5시에 일어나 바로 준비했다. 씻고 빵으로 대충 먹고 집을 나선 시간이 6시였다. 태권도원까지 4시간 가까이 걸린다고 해서 놀랐다. 고속도로로 바로 갔어야 했는데 잠깐 망설이다 강변북로로 들어섰더니 차가 무지 밀렸다. 결국 휴게소 한 번 들르고 도착한 시간이 10시 반이었다. 가는 내내 내용 녹음한 것을 들었다. 여러 번 들으니 외워지는 게 있었지만 여전히 아직 외울 게 많았다.
허리가 아플까 봐 조심하면서 운전했다. 생각보다는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대수련장으로 갔더니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작년과 다르게 바로 몸을 풀고 기본 동작과 발차기, 품새 연습을 했다. 미트를 가져오지 않아 가져오신 분과 같이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아침에 시험을 치른 S님이 오셔서 빌려주고 가셨다. 좋은 결과 있으시기를...
연습하다가 나보다 한 살 어린 분과 친해졌다. 그분도 또래를 찾은 모양이었다. 10년 넘게 아침 어머니 태권도교실에서 수련해 왔다고 한다. 세종에서 오신 분인데 그쪽에서는 무료라고 한다. 그런 혜택이 있다니 살기 좋은 곳이다. 4단이어서 자세가 안정적이었다. 구술시험을 위해 교본도 다 읽고, 여러 족보를 취합해 대동여지도 같은 큰 종이에 적은 걸 펼쳐 외웠다. 웬만한 내용이 다 들어있어서 놀랐다. 나도 다음에는 이렇게 정리해서 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후 젊은 사범님이 나타났다. 세종에서 오신 분과 짝꿍이라고 한다. 나도 빨리 짝을 찾아야 했는데 앞번호 남자분은 왔다는데 연락이 없고, 뒷 분은 단체 대화방에도 계속 안 들어와 불안했다. 결국 다른 분들과 몇 번 맞춰 보았는데 그동안 내가 연습한 것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저번처럼 또 미트 잡는 연습만 했다. 짝이랑 미리 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 시험 치러 올라가기 직전에야 줄 서다가 만났다. 태권도를 전공하는 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너무 잘할 것 같았다. 그래도 발차기는 한번 맞춰봐야 하는 건데, 걱정되는 마음이 앞섰다.
시험장 앞에서 딱 한 번 순서만 맞췄다.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았다. 시험장에 들어가면서 보니 태극 8장과 금강이 우리가 해야 할 품새였다. 그동안 수없이 했던 품새이지만 시험장에서는 느낌이 또 다르다. 저번에 7장 하며 실수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잘해야지, 다짐했다. 기본 동작과 발차기, 품새가 무사히 끝나고, 앞번호인 나부터 발차기를 했다. 그런대로 잘했다. 숨이 차서일까, 내가 미트를 잡을 때 누가 실수를 한 건지 모르지만 두 번째 발차기 동작에서 미트와 발이 맞지 않아 당황했다. (내 생각에는 내가 맞았고, 그분은 자신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결국 멈추고 내가 심사관님께 "다시 해도 될까요?"하고 물었더니 그냥 이어서 하라고 했다. 2번 발차기 후반부부터 다시 했다. 뒤에도 한두 번 꼬인 것 같다.
마치고 짝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얼굴 들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내가 잘했어야 했는데... 나 때문에 그 친구까지 떨어질까 걱정되었다. 구술시험장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다시 올지도 모르는데 구술을 잘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들어가니 익숙한 풍경, 세 분 중 가운데 심사관님이 나를 보더니 방긋 웃으셨다. 젊은 사범님들 틈에 웬일인가 하는 눈치였으나 기분이 좋았다. 그분만 보며 계속 대답했다. 네 문제가 모두 내가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었고, 예상치 못한 문제여서 천천히 읽으며 생각하고 더듬거리면서라도 기억나는 대로 최선을 다해 답했다. 2품, 2단 시험 과목을 물었는데 처음에는 태극 4~8장과 고려만 답했다가 추가로 기본동작과 겨루기도 한다고 했더니 가운데 분이 다행스럽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그게 왜 그제야 생각이 난 건지... 시험은 시험이다.
모두 마치고 나오면서 내년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또 했다. 연구년도 다섯 번만에 되었는데 이제 겨우 두 번 온 걸로 좌절하면 안 된다. 게다가 대부분 4단 이상 사범님들인데 나는 아직 2단이지 않는가? 내년에는 필기부터 다시 봐야 하는 게 조금 힘들겠지만 아마 나는 또 도전하고 있겠지. 내년에도 전담해야 하니 또 교무를 해야겠구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년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혼자 조용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또 떨어지면 너무 창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3단일 테니 지금보다 더 낫겠지.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될 때까지 해 보는 거다.
S님에게 아마도 내년에 다시 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S님이 결과를 기다려 보자고 했다. 관장님께는 죄송해서 월요일 도장에 가서 말씀드려야겠다. 낮에 관장님 친한 국기원 분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을 때, "또 오셨네요." 하는 말에 어찌나 쑥스럽던지. "그만 오고 싶어요." 하며 웃었다. 1년 만에 찾은 국기원은 그대로였다. 몇 번 더 오면 정들겠다. 오가는 길, 거의 8시간 이상 운전한 것 같은데 생각보다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만나려던 진주 사는 절친이 오늘 수술을 해서 못 만나고 올라왔는데 다음에 그 친구를 보고 오려면 아무래도 1박은 해야 할 것 같다. 당일치기는 쉽지 않겠다.
올라오면서 휴게소에서 도원에서 친해진 두 분께(연락처를 교환했었다)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고, 만나서 좋은 기억 가지고 올라간다고,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고 메시지 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분도 책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했다. 그동안 구술공부 하느라 못 읽은 책을 실컷 읽고 싶단다. 나도 책 좋아해서 블로그 운영 중이라고 했고, 읽고 싶다는 <말그릇>,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지대넓얕 무한>을 나도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차에서 내리니 온몸이 아팠다. 쓰라린 기억도 있지만 그리웠던 태권도원에도 가고 좋은 분들과 행복한 추억도 남길 수 있어 대체로 멋진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