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lly Feb 26. 2021

국립수목원과 비둘기낭

  새학기 준비로 바쁜 한 주를 보내고 하루의 휴가를 얻어 개학 전 잠시 걷고 왔다. 지난 주에 미리 예약해 둔 광릉 국립수목원과 포천 한탄강 주상절리길의 비둘기낭에 다녀왔다. 코로나에도 찾기 좋은 고즈넉한 곳이었다.


  아침에 학생들과 부모님들께 연락하느라 예상보다 늦게 출발했고 삼중 추돌 사고로 가는 길에 차가 많이 막혀 11시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확인하니 2000보였다. 사실 입구를 못 찾아 지나쳤다 다시 돌아와 주차를 하고 예약했던 입장권을 받아 QR 코드를 찍고 입장했다. 오래 전에 왔었는데도 굉장히 생소한 느낌이었다. 안으로 걸어들어가 새 소리와 물소리를 들으니 새학기로 분주하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길이 여러 갈래라 이정표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썬글라스를 낀 한 여성분이 이쪽 먼저 보라고 해서 그쪽으로 들어섰더니 산책로가 있었고 얼음 사이로 녹은 물이 힘차게 흐르는 개울과 아직 얼음을 품은 호수가 나왔다. 호숫가를 천천히 돌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가족을 보았다. 산책길을 나와 키 큰 전나무 숲길로 들어섰다. 제주 사려니에 버금가는 자연의 숲이다. 언덕으로 보이는 숲길을 통해 한 바퀴 돌고 싶었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막혀 있어 되돌아나온 것이 아쉽다. 아직도 하얀 얼음 아래 졸졸 시냇물 소리가 나를 위로했다. 돌아 나오는 길에 나무가 깔린 숲생태 관찰로를 발견해 들어갔다. 쓰러진 나무까지 자연 그대로 보존한 곳이다. 이곳을 걷다 칠팔 년 전 녹음 짙은 초여름에 함께 이 길을 걷던 동료 선생님이 떠올라 메시지를 보냈다.



  정문 가는 길에 또 다른 숲길이 있어 들어갔다 입구의 땅이 질었다. 조금 걷다 보니 유리온실이 보였다. 전나무 숲. 아까 길이 막혀있던 그 길과 연결되나보다. 봄 날씨다. 언덕을 오르다 보니 산림곤충 스마트 사육동이 있었다. 숲 속 곤충을 기르는 곳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더 올라가니 동물원에 있을 법한 낡은 건물과 길을 막은 나무 시설이 있어 돌아내려왔다. 12시 26분 만 보. 언덕 오르면서부터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마스크를 낄 필요가 없었다. 코로나에도 찾기 좋은 여행지. 숲길을 계속 걷다 보니 조선시대 선비가 되어 산길을 걷는 착각에 빠졌다.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길 옆 개울의 하얀 얼음이 아직도 단단해 보였다. 얼음도 곧 녹을 것이고 코로나도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날이 오겠지.


  열대식물전시원은 내부 공사로 개방되지 않아 아열대 식물원에 들어갔는데 너무 더워 잠깐 둘러보고 바로 나왔다. 무성한 로즈마리가 길을 막을 정도로 잘 자라고 있었다. 경주에서 이사 온 듯한 다보탑과 석가탑을 지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난대온실로 들어갔다. 아열대실 보다는 덜 덥고 관리도 잘 되어있었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식물들도 많았다. 두 여성이 참식 나무라 씌어 있는 나뭇잎을 문질러 냄새를 맡는 걸 보고 나도 해 볼까 하다가 잎 표면이 하얗게 닳아 있어 그만두었다.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며 정수기에서 빈 물통을 채웠다. 온실들은 아주 추운 날 잠시나마 몸을 녹일 수 있는 곳이겠다. 키 작은 나무 언덕은 스산해서 돌아 나왔다. 봄이 오면 더 예쁠 것 같다. 1시가 다 되어 정문 쪽으로 향했다. 만 이천 보.


  정문 쪽으로 나오다가 오리가 노니는 익숙한 호수와 정자를 보았다. 수생식물원이라 적혀 있었다. 그 옛날 동료 선생님과 정자에 앉아 한참 이야기 나누던 게 생각나 벤치에 앉았다. 그 때 따님과 러시아 선교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시 중학생이던 딸이 작년에 한동대학교에 입학했다. 장소가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진리를 되새긴 날이다. 


  1시간 남짓 달려 3시 비둘기낭 주차장에 도착했다. 드라마 킹덤 속 비둘기낭 처럼 맑고 파란 물을 상상하고 왔는데 생각지 않게 물이 다 말라 있었다. 겨울인 걸 깜박했다. 차를 세운 곳 옆에 바로 하늘다리가 있어서 건너갔다 왔다. 원래 비둘기낭부터 이어지는 길이 있는데 겨울이어서인지 막혀 있었다. 오가는 길, 다리가 바람에 많이 흔들렸다. 



  다리나 좁은 길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함께 걷는 사라들을 관찰하게 된다. 기억에 남는 이들이 있었는데 스스로 꼬맹이가 아니라고 우기는 꼬맹이와 아빠, 그리고 두 커플이다. 한 커플은 건강해 보이는 명랑한 이들이었고, 다른 커플은 맞춰 입은 듯 베이지 빛 가디건이 예쁜 우아한 남녀였는데 아가씨의 살색 스타킹의 올 나간 게 햇빛에 눈에 띄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싶기도 하고, 조만간 저런 데이트를 할 우리 아이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비둘기낭 둘레길이 막혀 있어 많이 걷지 못해 돌아오면서 보니 19000보가 찍혀 있었다. 천천히 걸어 부담이 없었던 길, 이제 앞으로 치열한 3월을 맞게 될 텐데 오늘을 기억하며 너무 과하지 않게 그러나 열심히 살아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얼떨결에 간 곡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