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코로나로 좀 뜸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주말마다 바쁘게 지냈다. 늦게 배운 바이올린으로 꽃을 피우던 인생의 황금기였다. 한동안은 주말에 수업하는 음악학교와 대학원을 다니느라 바빴고, 그 와중에 오케스트라와 앙상블도 병행해 연주와 연습으로 주말이 더 바쁘지만 행복한 나날이었다.
스물아홉에 처음 바이올린을 잡았다. 막내를 임신하고 있을 때였다. 근무하던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바이올린 동아리를 만들었는데 우리 교실을 사용하고 싶다고 빌려달라고 했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함께 하자는 말에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어차피 교실에서 다른 일 못할 테니 바이올린이나 배워 볼까, 하는 마음으로 동참했다. 오후 방과후 수업을 위한 유휴교실이 없어 우리 반에서 아이들이 강사님께 레슨을 받고, 아이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이 수업을 받는 형식으로 주 1회 진행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10명이었는데, 한 주 두 주 지나자 한두 명씩 안 보이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은 강사님이 대여를 해 주어 집에서 연습이 가능했지만 레슨 시간이 유일하게 바이올린을 여는 시간일 정도로 틈이 없었다. 3개월이 지나자 10명 중 반이 그만두었다. 동지가 사라진 것 같아 외롭긴 했지만 내가 받을 수 있는 레슨 시간이 늘어난 것은 나쁘지 않았다. 5개월 후 혼자 남고 모두 그만두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교사 바이올린 동아리는 없어졌고, 나는 어떻게 하면 더 배울 수 있을까 고심하다 그때부터는 아이들 틈에서 아이들과 같은 방과후 수업료를 내고 주 1회 약 5분 레슨, 나머지는 연습하는 방식으로 계속 배워 나갔다. 점점 불러오는 배처럼 바이올린이 재미있어졌다.
그 때만 해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아이들 키우느라 연습할 틈을 찾기도 어려웠고 학교는 늘 바빴다. 레슨 날이 바이올린을 여는 나날이 계속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같은 강사님이 계속 방과후 수업을 하는 바람에 그분께 쭉 배울 수 있었다. 나와 동갑이었던 그분은 참 말이 없는 남자 강사였다. 잘한다, 못한다 뿐 아니라 거의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스즈키라는 교재로 했는데 진도는 굉장히 빨리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진도 빠른 게 결코 좋은 건 아니었다.
밑바닥 실력으로 교회에 챔버가 생길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배운 지 1년쯤 되었을 때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다. 시작은 전공 준비하는 중학생과 바이올린 초보로 이루어져 있어 부담은 적었지만 과연 우리가 예배 반주를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합지졸이었다. 해를 거듭하면서 전공한 친구가 합류하고, 나는 총무로 간식을 챙기는 애정을 발휘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도 왠지 모두 나만 보는 것 같아 늘 긴장하고 떨었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 멀리 이사를 오면서 레슨도, 챔버도 하지 못하고 바이올린을 꺼내지도 않게 되었다. 아이들 키우느라 바빠서 짬 내기 어렵긴 했으나 늘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막내가 7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운전하고 지나가다 길가에 붙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단원 모집 플래카드를 보게 되었는데 연습 장소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여서 바로 입단을 했다. 오케스트라라고 하지만 인원이 그리 많지 않은 현악 앙상블 정도였다. 바이올린을 뒤늦게 전공한 지휘자는 원래 공학도였다고 한다. 늦깎이 음악인에 대한 배려가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악보들을 연주하기 어려워 집에서 연습을 많이 했지만 레슨을 안 받은 지 오래인 데다가 사실 그간 받은 레슨도 주 5분 정도라 독학과 다름없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같이 연주하고 음악과 악기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그 시간이 정말 소중했었다.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저녁 시간을 내기는 아마도 거의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육아에 찌들어 있던 나에게 숨 쉴 수 있는 틈이기도 했다. 조금씩이나마 악보 읽는 실력이 느는 것 같기도 해 성취감도 있었다. 그러던 중 교회를 옮기면서 교회 챔버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늘 세컨 파트이지만 묻혀서 연주하는 내가 굉장히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특주를 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여러 명이었는데 다들 시간이 안 된다고 하여 독주를 하게 되었다. 이 정도쯤이야, 했던 게 한 달을 준비했는데도 얼마나 떨었는지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날 이후 내 별명은 무대에서 오들오들 떠는 ‘사시나무’가 되었다. 수요예배여서 사람이 적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그 일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나의 밑바닥 실력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은 생각을 한 것이다.
주말에 다닐 수 있는 음악대학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서대문 쪽에 있는 기독음대라는 곳에 입학했다. 2년 제이고 학위는 없지만 교수 레슨을 받을 수 있고, 학비도 정말 저렴했다. 토요일 반나절만 가면 되는 것도 좋았다. 처음 간 날 학기가 이미 시작된 때여서 교내 연주회가 있었다. 선배들의 연주를 보며 나도 예쁜 드레스를 입고 저렇게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드레스를 검색하며 돌아온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드레스 입고 원 없이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레슨을 해 주신 교수님은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를 닮은 아리따운 분이었다. 체계적으로 한 시간 채운 레슨을 받는 것이 처음이라 조금씩이나마 실력이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스케일과 연습곡, 그리고 곡을 하나씩 해 나갔다. 그동안 아이들과 함께 배운 방과후 수업 동안 스즈키는 거의 다 했던 것이다.
2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갔는지. 다 좋은데 무대에만 서면 떠는 게 문제였다. 기말고사와 음악회 때마다 나는 다시 사시나무가 되었다. 무대공포증은 회를 거듭한다고 그리 나아지는 게 아니었다. 한 번도 만족스러운 연주를 하지는 못했지만 반주 전공 친구의 졸업연주와 나의 졸업연주까지 무사히 마쳤다. 2년을 더 다니면 학위가 나오는 코스가 있었는데 보다 큰 곳에서 배우고 싶은 생각에 1년 반을 쉬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관현악과에서 바이올린 전공으로 석사를 받는 코스인데 주말에만 수업을 해서 좋았고, 학비도 다른 대학원에 비해 저렴해 좋았다. 무엇보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늦깎이 음대생을 많이 만나게 된 것이 가장 신났다.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언니 동생 사이로 지내며 작년까지는 대학원 선후배 앙상블 활동도 활발히 했으고 코로나가 끝나 다시 연습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
대학원에 가서 좋은 점은 레슨뿐 아니라 음악의 이론과 실제의 전반적인 부분을 배운 것이 좋았다.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는 느낌이었다. 그즈음 근무하던 초등학교에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이어서 지휘나 피아노, 첼로를 부전공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레슨은 기독음대 교수님이 더 좋았는데, 여기서는 스케일과 연습곡을 더 높은 수준의 교재로 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학기별로 시대 순으로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5학기째에 있을 졸업연주회를 첫 학기부터 준비하는 마음으로 임했다. 무슨 곡으로 졸업 리사이틀 45분을 채우나, 하는 것이 즐거운 고민이었다.
대학원까지 거리가 좀 멀어 수업받고 오려면 주말 하루 온종일이 걸리는데 나는 욕심껏 2주에 한 번 연습이 있는 오케스트라까지 입단했다. 그전 오케스트라에 비해 규모도 크고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어 활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는 햇수가 거듭될수록 악보 보는 것도 나아지고, 눈치도 빨라졌다. 그러자 또 욕심이 생겼다. 오케스트라처럼 묻혀서 하는 연주도 좋지만 소규모 앙상블에서 내 소리를 내고 싶어진 것이다. 대학원 근처에서 연습하는 봉사활동이나 카페 연주가 많은 앙상블을 발견하고 주중 하루를 내어 또 연습을 갔다. 학교 근무에 퇴근 후에는 아이들 돌보랴 연습하랴 연주하고 공연 다니느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가족에게 미안했지만 날개를 단 듯 훨훨 날아다녔다. 봉사연주 후 느끼는 보람도 컸다. 마지막 학기를 맞아 졸업 연주회까지 무사히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나의 연주와 연습 모임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이어온 세월이 어언 19년. 뱃속에 있던 막내가 올해 스무 살이 되었다.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작년 한 해 동안은 막내의 입시를 핑계로 교회 챔버를 제외한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아, 대학원 졸업 후 학사학위가 없다는 생각에 집에서 멀지 않은 대학 미래교육원에서 학점은행제 학위과정에서 레슨은 계속 받아 오고 있긴 하다. 이제 막내가 대학생이 되고, 코로나가 진정되면 나의 연주 활동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아직도 독주는 부담스럽고, 예쁜 소리는 여전히 나지 않으며, 무대에서 떨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 주고 심장이 세차게 뛰게 하는 바이올린 연주는 내가 숨 쉬는 한 계속하고 싶은 것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