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들은 대부분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그동안의 일들이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고성 해변을 거닐며 파도를 바라보았다. 그간의 고민과 아픔이 파도에 씻겨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바다는 다 받아들인다고 바다일까? 그래서 나는 바다를 좋아하는 것일까? 나의 고민도 아픈 기억도 모두 바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바다를 만드신 창조주께 감사를.
숙소에서 아침 독서를 하고 글을 쓰다가 10시 오픈 시간에 맞춰 여름에 왔을 때 재료 소진으로 먹지 못했던 수제비집에 갔다. 수제비를 시킨다는 걸 모르고 칼국수를 시켰다. 아주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먹을 만했고, 그래서 내일은 오늘 먹지 못한 수제비를 시켜야겠다는 핑곗거리가 생겼다. 숙소로 돌아와 책을 읽다가 마지막 날 편지를 건네준 두 아이에게 편지를 써서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조금 후에 한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반 아이들 몇 명이 만나 놀고 있다가 선생님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반가웠다.
오후 내내 책을 읽다가 점심 겸 저녁을 먹기 위해 나섰다. 가는 길에 저번에 왔을 때 문이 잠겨 있어 가보지 못했던 북끝 서점에 들렀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신발장에 넣어야 하는데 사람이 많아 신발장이 가득 차서 건물 밖에 벗어놓고 들어갔다. 작은 서점 안에는 책이 많지 않았다. 시, 소설, 에세이, 신간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하나씩 훑어보다가 ‘내 책도 여기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세이 아래쪽에 ‘도시인의 월든’이라는 책이 있었다. 주인장님이 손수 연필로 줄을 긋고 메모한 샘플 덕분인지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표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른 책들을 더 보다가 결국 이 책을 구입했다. 사장님이 결제를 하며 말씀하셨다.
“이 책이 작년에 저희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렸답니다.”
말하지 않을까 하다가 갑자기 말이 나왔다.
“사실 저도 책을 냈는데 혹시 한 권 보내드려도 될까요?”
“그래요? 제목이 뭔가요?”
“태권도와 바이올린이라는 책이에요.”
“혹시 지금 가지고 계신가요?”
맹그로브에 사인을 해서 놓고 나왔는데...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제가 온라인으로 여기로 주문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1월 내내 외국에 가 있다 올 거라서 2월에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깝다. 내 책을 차에 몇 권 두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쪽에서 유명한 막국수집이 아닌 지난여름에 갔던 막국수집에 갔다. 반찬으로 나오는 명태 회무침이 너무 맛있었던 기억이 나서였다. 이번에도 감칠맛 나는 회무침 덕분에 막국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해변으로 향했다. 여름에 앉았던 카페가 그리웠다. 기억을 더듬어 잘 찾았다. 아름다운 해변이 바로 보이는 2층 자리에서 달콤하고 부드러운 초코 라테를 먹으며 아까 산 책을 읽었다. 내가 앉아 있었던 한 시간 반 동안 자매로 보이는 여자 아이 둘이 내내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로비에 내려와 마지막 밤을 보낸다. 낮에 김겨울 님의 책 한 권을 다 읽었고, 카페에서부터 에스메이의 일기 원서를 반쯤 읽었다. 도시인의 월든도 반 가까이 읽었다. 쓰고 싶었던 글도 네 페이지 썼다. 여기는 집중이 너무 잘 된다. 2월에 북끝 서점에 내 책을 가져다 드리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고 먹고 읽고 쓰는 일만 하면 되는 소중한 기회를 또다시 갖고 싶다. 두 번째 온 교암리는 이제 낯설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