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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주 Jul 13. 2021

따로국밥처럼 따로 또 함께

치매도 육아처럼 15

 잘 익은 깍두기를 곁들여 한 그릇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국밥을 좋아한다. 그런데 국과 밥을 따로 주문할 수 있다면 나는 언제나 따로국밥이다. 마지막 한 술까지 고슬고슬한 밥의 식감과 칼칼하고 개운한 국물 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일행에게 맛을 잘 모른다고 핀잔을 받아도 개의치 않고 콧잔등에 송송 맺힌 땀방울 닦아내며 뚝배기를 기울여 마지막 한 술까지 맛나게 추릅~

 "며느리랑 바로 옆집에 살아요. 창문 열고 어머니~하고 부르면 가서 맛있게 먹는답니다.호호호."  어머니 생각 속의 며느리집은  퍽 가깝다.

 어머니가 바로 옆라인에 이사 와서 따로, 또 함께 지내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취향대로 고르는 국밥처럼 가벼운 선택과 결정은 아니었지만 따로 살게 되어 서로의 생활공간이 분리된다는 점에서 또, 하루 중 얼마의 시간은 합가 한 듯 지내게 되었다는 점에서 '따로국밥'같은 상황이 되었다. 따로국밥을 즐기듯 잘 지낼 수 있을까?라고 미리 걱정, 염려 따위 하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살아보니(뱃속 나이까지 억지로 계산하면 반백년 살았으니 이런 말 해도 된다고 봄) 미리 고민해서 살림살이가 나아진 경우는 별로, 거의, 전혀 없었으니까.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할 때가 언제일까에 대한 고민은 결혼 전부터 시작해서 거의 20년간 줄기차게 이어진, 내 걱정 주머니에 늘 묵직하게 큰 자리 차지하던 항목이었는데 뭐하러 그랬을까 싶다. 막상 닥치고 보면 여러 변수로 인해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전개되기 일쑤여서 미리 고민하고 계획한 것이 무용지물이 되곤 했다. 그래서 오히려 걱정 주머니를 비우는 데 주력하며 가볍게 마음을 푼 다음 출발선에 자리 잡고 신호 총소리에 귀 기울였다.

준비~

 "땅!"


 우선 신고식.

 경비아저씨와 옆집, 아랫집(꼭대기층이라 윗집은 없어서 한결 가뿐했다) 이웃분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첫 번째 명함을 만들었을 때에 비해 어머니 모습도 바뀌었고(염색을 하지 않게 되어 은은한 실버 그레이 컬러의 헤어스타일에, 살이 쪄서 얼굴 윤곽도 둥그스름해졌다) 주소도 바뀌어서 새로 명함을 만들어 두었다가 맛있는 떡과 함께 포장하고 편지도 정성껏 써서 동봉했다.


 안녕하세요? 새로 이사 온 1203호예요.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데 아직은 초기라 저희가 옆라인 706호에 살며 돌보게 되었습니다. 화재의 위험이 있는 제품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 불편한 일을 겪게 되시면 동봉한 명함의 연락처로 연락 주세요. 최선을 다해 해결하겠습니다..

   - 706호 아들&며느리 올림


 어머니의 병세를 알리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를 보호하고 이웃분들에게도 폐가 되지 않도록 알리기로 했는데 이후에 어머니가 엉뚱한 층에 내려 헤맬 때나 이웃집 현관 도어록을 열려고 했을 때 모두 우호적으로 대해 주셔서 알리기를 잘한 것 같다.

 특히 경비아저씨들은 24시간 지킴이를 자처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경비아저씨의 활약상을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그리고 '문패' 만들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모든 집 대문이 다 똑같은 아파트라 동, 호수를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뚜렷이 알아볼 수 있게 표식이 필요했다. 영문학도였던 어머니의 자긍심을 살려줄 영어 문패를 큼직하게 달아드렸더니 처음엔 좀 민망해하셨지만 나중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문패가 보이면 얼굴이 환해졌다. 내 집을 찾아왔구나 하고.

 

 다음은 라벨 붙이기.

 전에 살던 집에서도 물건이 뒤죽박죽 섞여서 찾기 어려워하시던 어머니는 새로 이사 온 집이라 못 찾겠다고 더욱 성화였다. 그래서 큼직하게 라벨을 만들어 곳곳에 붙였다.

 옷장과 서랍에는 겨울옷, 여름옷, 봄가을 옷, 양말, 속옷..

 싱크대에는 냄비, 프라이팬, 식기류, 밀폐용기, 컵..

 냉장고에도 홈바 버튼 옆에 '우유, 주스, 치즈 드시고 싶을 때는 이 버튼을 눌러주세요'라고 붙여놓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문자해독에 관심도 없게 되었지만 한동안은 내가 출동하지 않고도 전화로 알려드리기에 유용했다.

  

   마지막으로 실종방지 팔찌 채우기

  이사 온 곳이 어딘지도 알지 못하는 어머니가 혹시 길을 잃으면 누군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인식표를 몸에 부착해야 했다. 아무래도 너무 티 나는 인식표는 거부하실 것 같아서 궁리하다가 특별한 이벤트를 계획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공방에 가서 내 전화번호를 각인한 은팔찌를 함께 만들기로. 딸도 친구 생일 선물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따라나섰다.(사실 혼자 어머니를 케어하기 어려울 것 같아 밑밥을 깔았더니 딱 걸려들었다^^)  은점토를 빚고 굽고 연마하는 과정이 꽤 오래 걸려서 공방 근처 숨은 맛집에서 맛있는 점심도 먹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덤으로 얻었다. 그렇게 3대가 함께 예술혼을 불태운 결과 투박하지만 정겨운 팔찌가 탄생했다. 어머니는 팔목에 팔찌를 차시더니

 "친구들 만나면 아이고 왜 이렇게 머리가 지끈거리나? 하면서 이렇~게 하고 팔찌 자랑해야 되겠어! 호호호" 하시며 팔찌가 잘 보이게 손을 이마에 갖다 대셨다. 인지저하 와중에도 빛나는 유머감각!^^  

 (그때 공방 블로그에 우리 작업 후기를 올려주신 기억이 나서 다시 찾아보니 아직 남아 있었다. 공방 선생님의 아름다운 눈으로 기록한 글이라 과분한 칭찬이 포함되어 있으니 적당히 거르고 봐주시길...

https://blog.naver.com/daldal3206/221013491843)


  이밖에도 현관문 비밀번호 바꾸기, 전화와 신문 배송지 이전 같은 이사 시 제반 변경사항 처리와 화재경보기 달기 같은 안전과 방범을 위한 조치도 착착 진행했다.

 그리고 또 뭘 했더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도 하나도 기록하지 않은 나.ㅜㅜ

 



 어머니와 짝을 이뤄 2인 3각 경기하듯 허둥지둥 좌충우돌 걸음마를 시작한 지 햇수로 5년이 되었다.

 출발선에서 얼마나 왔을까?

 결승선은 어디쯤일까?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아~~ 시원~~ 한 콩나물국밥이 급 땡긴다.    

 


치매도 육아처럼 15 실종방지 팔찌는 직접 가서 만들지 않아도 주문 제작해 주는 인터넷 쇼핑몰이 많이 있다. 발품을 팔아 동대문시장 액세서리 재료점에 가면 알레르기 방지 금속소재에 원하는 대로 문자를 새겨준다. 마음에 드는 끈을 골라 연결하면 저렴하고 멋스러운 팔찌나 목걸이를 만들 수 있다. 또 리본테이프에 문자를 인쇄해주는 곳(어떤 형태인지 블로그 참고하세요^^ https://blog.naver.com/label8808/220301317534)도 있는데 잘라서 옷에 라벨로 붙이기 좋은 아이템이다. 단, 동대문 시장은 미로 같은 공간에 작고 반짝이는 물건이 너무너무 많아 치매환자와는 동행할 수 없는 곳이다.ㅜㅜ  

동대문시장에서 새긴 각인
공방에서 새긴 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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