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우리 아파트로 이사 오시고 나서 내 핸드폰 연락처엔 경비아저씨들의 전화번호가 추가되었다.
그분들이 어머니 때문에 급하게 연락하셨을 때 모르는 번호라고 무심코 놓치는 일이 없도록 미리 저장해 둔 것이다.
우리 동엔 모두 72가구가 사는데 두 분의 경비아저씨가 교대로 나오셔서 많은 일을 도맡아 주셨다.
아파트에 나무가 많아서 봄엔 꽃잎, 여름엔 자잘한 열매, 가을엔 낙엽(특히 메타세쿼이아는 주차된 차에 털옷을 입힐 만큼 어마어마한 '털갈이'를 했다.ㅜㅜ)이 오래되어 울퉁불퉁해진 보도블록 틈새까지 어수선하게 내려앉았고 겨울엔 그놈들이 사라진 자리를 눈이 비집고 들어와 쉴 틈 없이 청소 거리를 만들었으니 그것만 치워내기에도 하루 해가 짧을 지경인데 방범활동에 재활용 쓰레기 정리, 우편물과 택배관리, 유인물 배부, 주차관리, 설문조사, 민원처리까지... 어휴~ 그 많은 업무들을 감당하면서도 아저씨의 레이다는 내 무거운 장바구니까지 감지하고 거들어주시는가 하면 일렬 주차되어 있는 차를 낑낑대며 밀고 있을 때도 어느새 와서 도와주시고 화단도 잘 가꾸어 주셔서 계절의 변화와 함께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을느끼게해 주셨다.
가뜩이나 일이 많은 경비아저씨께 너무나 죄송했지만 어머니의 병세를 알려드리고 혹시 혼자 밖에 나와서 배회하는 것 같으면 바로 나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그 당시 어머니는 바깥나들이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주로 집에 계시긴 했지만 치매란 게 항상성을 기대할 수 있는 병이 아니므로 내가 모르는 사이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간보호센터에 나가시기 전에는 하루의 대부분을 보호의 사각지대에서 혼자 계셔야 함에도 요양보호사의 방문은 극구 사양하셔서 그 의사를 존중해드리기로 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막상 시도했다면 예상과 달리 어머니가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당시엔 뭐든 시도해보고 융통성을 발휘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경비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다.
사실 경비아저씨게 부탁은 드렸지만 그렇게까지 활약해 주시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에! 당장 히어로 영화에 출연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멋짐이 뿜 뿜!!!^0^
어머니가 저녁을 드시러 우리 집으로 오실 때 어느 구멍(어머니의 표현에 의하면 ^^)으로 들어가야 우리 집인지 몰라 출입구를 기웃기웃하시면 경비아저씨가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우리 집 층 버튼을 누르도록 도와주셨고, 병세가 더 악화되었을 땐 집에까지 모시고 와 주시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환한 얼굴로 우리 집에 들어서며
"저 아저씨가 나를 참 좋아해. 호호호.. 내가 장에 다녀올 때마다 찐빵이나 귤 같은 걸 드시라고 꼭 챙겨드리거든. 그래서 그런지 나만 보면 저렇게 인사를 한다? 호호호.."
"참 잘하셨어요!"
20여 년간 들은 멘트라 어머니껜 얼른 건성으로 대답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신 경비아저씨를 향해 감사하다고 소리쳐 인사드리곤 했다.
경비아저씨께 가벼운 간식이라도 전해 드리면 어머니는 당신이 드리는 것처럼 기뻐하시며
"나도 평생 그랬는데 어쩜 이리 날 빼닮았을까!"라고 하셨고 나는
"어머머? 무슨 그런 말씀을! 저야 우리 엄마를 닮았겠죠! 참~.' 하며 투덜투덜...
무슨 말씀을 하셔도 예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고얀 며느리가 툴툴대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다시 찐빵 미담을 시작하셨다.ㅎㅎ
하루는 딸 하교시간에 경비아저씨께 전화가 걸려왔다.
딸이 다니는 학교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내가 차로 태워주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과 오후에 30분가량 비는 시간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할머니가 나오셨는데 집에 들어가시게 해도 한사코 빵을 사야 한다고 하시면서 상가로 가시길래 제가 뒤를 따라가고 있어요."
"아이코 바쁘실 텐데 자리를 비우게 해 드려 너무 죄송해요. 그래도 제가 갈 때까지 같이 계셔 주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네네! 지금 막 빵집에 들어가셔서 저는 밖에서 기다립니다."
"고맙습니다! 얼른 갈게요~."
아파트에 들어서서 차창밖으로 살펴보니 어머니는 빵 봉투를 들고 잔뜩 성 난 얼굴로 뒤를 흘깃흘깃 보시며 걷고 경비아저씨는 한 걸음쯤 뒤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걷고 계셨다.
주차장까지 남은 거리는 얼마 안 되었지만 차를 세우고 어머니를 태웠다.
"저 아저씨 참 이상해! 내 뒤를 왜 저리 쫄쫄 따라다닌다니? 참 나, 살다 살다 별 일이 다 있네?" 하시며 투덜대셨고
경비아저씨는 어머니를 안전하게 인계하고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서둘러 경비실로 복귀하셨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경비아저씨는 아저씨대로 얼마나 기막힌 동행이었을까...
그 후로 어머니 지갑에서 지폐는 거두어들였다. 쇼핑하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그 일을 못하게 원천 봉쇄하는 것이 영 마음 무거웠지만 안전이 우선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미처 생각지 못한 동전지갑이 남아 있어서 어느 날은 그 동전 지갑을 갖고 빵집에 가시기도 했다. 그때도 역시 경비아저씨는 흔쾌히 동행이 되어 주셨다.
어머니가 주간보호센터에 다닐 때에도센터 차를 타기 위해 너무 일찍 나와 기다릴 때면 경비실에서 멀리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지켜봐 주시곤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 큰 일 날 뻔한 일이 있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경비아저씨는 눈부신 히어로였다.
한겨울은 아니었지만 아주 추운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우리 집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림과 동시에 반려견까지 굉장한 소리로 짖어댔다.
깜짝 놀라 깨서 허둥지둥 나가는데 이미 바깥이 소란했다. 두 세 시쯤 되어 사방이 깜깜할 때라 갑자기 켠 형광등 불빛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문을 여니 어머니와 경비아저씨가 옥신각신하고 계셨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마침 경비아저씨가 야간 순찰을 하고 계셨는데 어머니가 얇은 파자마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나오셨길래 어디 가시냐고 묻자 아들이 와서 버스 정류장에 마중 간다고 하셨단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우리 집으로 가시자고 했더니 어머니는 아들한테 가야 하는데 왜 못 가게 하시냐며 역정을 내시고 경비아저씨는 곤란함을 무릅쓰고 어머니를 억지로 모시고 온 것이었다.
신을 벗고 들어와서도 계속 역정을 내시는 어머니의 몸에서 찬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아직 꿈속에 계신 듯 엉뚱한 말씀을 하시며 당신의 히어로, 경비아저씨를 천하에 몹쓸 사람으로 둔갑시키느라 사력을 다하는 어머니를 겨우 달래 따끈한 캐모마일차를 한 잔 마시게 하고 커다란 숄로 둘둘 감아 다시 집으로 모셔드렸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절묘하게 경비아저씨의 동선과 맞았으니 망정이지 캄캄한 밤에 키가 150센티도 안 되는 작은 사람이 느릿느릿 대로변까지 나가기라도 했다면 쌩쌩 달리는 차에 사고를 당할 수도 있었고, 길을 잃고 헤매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쓰러질 수도 있었다. 심지어 그때는 경찰서에 지문등록도 하기 전이었고 인식 팔찌도, 명함도 지니지 않은 상태였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대책을 고민하던 중 다행스럽게도 아주버님이 일 년간 어머니댁에 머무를 기회가 생겨서 안심할 수 있었다.
우리 아파트는 경비아저씨들의 근무 동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순환시킨다. 그래서 시간이 되어 다른 동으로 떠나실 때면 모두 어머니의 건강을 빌어 주셨고 오다가다 만나면 안부를 물어봐주셨다. 너무 고마운 우리의 히어로, 경비아저씨들.
주인공이 히어로의 정체를 알고는 벅찬 감동과 함께 진심 어린 감사인사를 전하는 장면이 꽤 임팩트 있게 삽입되는 영화에서처럼 어머니는 당신을 위험으로부터 구해준 경비아저씨에게 손수 맛있는 찐빵을 대접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경비아저씨가 몇 번이나 바뀌도록 그분들이 당신의 히어로였음을 알지 못한 채 무심히 이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