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드러내선 안 되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배웠다. 이따금 올라와 내 가슴을 아리게 만들어도 아린 가슴을 눌러가며 애써 무시했을 뿐이었다. 언젠가 엄마에겐 남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한 번도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만나보지도 못한 나의 삼촌이자 엄마의 남동생은 오래되고 빛바랜 앨범 사진에서 처음 만났다. 낯설지만 익숙한 웃음, 앳된 얼굴. 엄마는 그가 나의 삼촌이며 엄마의 남동생이라고 했다. 그는 내 나이 또래처럼 보였고 나의 친오빠와 똑 닮아있었다. 나는 왜 지금까지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을까 또 내 삼촌은 지금 어디 있을까 엄마는 왜 삼촌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을까, 당시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엄마에게 배운 대로 나 또한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혜주에 대한 모든 것을 숨기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 속으로 다짐했다.
숨기고 숨겨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마음이라 생각했고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숨겨왔던 마음을 들켜버렸을 때 나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그 마음이 창피하고 수치스러워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 마음은 너무 소중해 내비칠 수 없었고 조금의 죄책감과 함께였으며 제 가슴을 너무 아려오게 만들어 꺼낼 수 없었다. 수현은 내게 조심스럽게 [오혜주를 알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떨리는 입술을 애써 무시하며 수현에게 말했다. 알았었다고,
혜주,
오혜주. 혜주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혜주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지 않고 입 밖으로 소리를 내 꺼내는 게 몇 년 만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온 혜주의 이름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지고 귀까지 뜨거워져 수현 앞의 내 모습이 꽤나 보잘것없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쓸 겨를 없이 정신이 아찔해져 왔다.
뜨거워진 귀에서는 이명이 들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내 앞에 있는 수현, 수현이로 말하자면 그녀는 학생회도 아니지만 디자인과에선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녀가 지나갈 때면 모두가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걸고 친해지고 싶어 하는 그런 여성이다. 어디에나 있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이다.
어디에나 있고 모두가 알고 있는 수현의 입에서 이제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두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 오혜주의 이름이 나오다니, 이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어쩐지 두 사람이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를 낸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혜주 역시 모두가 그녀를 알고 있고 어디에나 존재했었다.
수현의 입에서 혜주의 이름이 난데없이 나오니 당황하여 떡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태연한 척 수현에게 물었다.
혜주를 네가 어떻게 알아?
수현은 혜주와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다.
너는 아직까지 혜주를 찾고 있는 것 같아서.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잘 숨겨왔는데, 잘 알지도 못했던 수현에게 들켰다니 혼란스러운 감정이 요동쳤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드러내지 않고 숨겨야 하는 감정으로 이십여 년을 학습해 왔으나. 이십여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머릿속에서 어떤 이성의 선이 뚝 끊기는 것처럼 수현과의 대화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숨기고 싶지 않고 혜주를 여전히 입에 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의 귀는 달아오르다 못해 타버릴 것 같고 손끝은 아려오는데 수현에게 쏟아내느라 입은 바빴다.
그리운 나의 혜주,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매일 밤 그녀를 찾아다니고 있음을 알렸다. 나는 혜주를 처음 본 순간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날의 혜주가 그립다. 어떤 밤에는 그녀가 어딘가에서 내가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것 같아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나는 여전히 혜주가 그립고 그녀가 보고 싶다. 나는 수현에게 혜주를 쏟아내고 있었다.
혜주는 그런 사람이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으며 내 속에 더 선명하고 또렷하게 그려지는 사람이다. 혜주는 내게 그런 존재이다.
그날, 그 봄에는 햇빛이 따갑지 않게 비추고 일렁이는 바람은 상쾌하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바라본 하늘은 구름이 떠 있었다. 그 봄날의 바람이 나는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내 생에 첫 벚꽃놀이였다. 날리는 벚꽃과 내리쬐는 햇빛에서 느껴지는 적당한 온기와 선선한 바람. 날씨에 잔뜩 취해버린 나는 이 순간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따라 국회의사당까지 걸어갔다, 그 아래 커다란 벚나무. 그 벚나무 아래에 작은 혜주가 있었다. 이마에 손을 얹어 햇빛을 가리고 서 있었던 혜주가 나를 발견 한 뒤 웃으며 걸어올 때 바람에 벚꽃이 휘날렸다. 언젠가 나는 혜주에게 [ 영화나 뮤지컬에서 주인공이 나타나면 스포트라이트를 쬐는 효과는 왜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올까? ]라는 물음을 남겼던 것이 생각났다. 혜주를 보니 알 수 있었다. 그 순간에는 내게 다가오는 혜주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그 순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 혜주만 보였다. 마치 이곳에서 혜주가 주인공이 아니면 누가 주인공이겠냐는 듯이 일렁이는 햇빛과 흐르는 벚꽃 잎이 반짝였다.
나는 그날의 혜주를 잊은 적이 없다.
그날을 왜 나는 잊지 못하는 것인가, 모든 게 완벽하던 날에 네가 나를 발견해서? 아님 네가 발견해서 완벽해진 날이었나.
그날에 네가 영화 같아 나는 여전히 너를 찾아 헤매는 것일까? 혜주야.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수현에게 완벽한 그날을 말하고 있었다. 입 밖으로 네 이름을 꺼내고 보니 그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이 용하다 생각이 들 정도로 혜주, 혜주 온통 오혜주였다.
참으로 이상하다, 내 입에서 혜주 네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 지난 몇 년간 내 안에 침수되었던 네 이름이 이리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니, 세상엔 별일이 다 생긴다. 이 시끄러운 술집에서, 다들 즐기러 나온 토요일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 [오혜주]라는 이름이 나왔지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네 이름을 꺼내는 순간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다 혹은 내가 무너질 줄 알았다. 나는 너를 찾아 헤맸지만 너를 찾아다니면서도 네 이름 세 글자를 말하지 못했다.
너를 찾으면서도 네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이유는 혜주 네가 죽어버려서, 그래서 나는 네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혜주는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유서에 나는 없었다.
나는 죽어버린 사람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을 그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앞에 앉아있고, 또 내가 죽어버린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라 인식했다.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찢기고 짓이겨져 입 밖으로 내뱉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혜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손끝이 잘리는 것 같은 통각이 느껴지는 아픈 일인데 혜주와의 작은 추억을 어떻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까.
그렇게 입 밖으로 꺼냈을 때의 나의 아픔을 나는 견딜 자신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나는 너의 죽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내가 무너지거나 녹아 흘러내릴 줄 알았다. 떠나버린 그 이름을 말하면 당신의 세상이 무너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떠나버린 이의 이름을, 상실해 버린 추억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수현의 입에서 혜주의 이름이 나왔을 때 나는, 수현에게 네 이름을 말했을 때 내 입에선 네 이름이 아닌 내 심장이 입 밖으로 빠져나갈까 입을 턱 막았었다.
두려움을 느꼈다. 심장이 세상 밖으로 나가버릴 것만 같아서, 때문에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 심장박동은 내 입 밖으로 나와 네 이름을 말한 벌을 내리려고 하는 걸까 혹은 네 이름이 반가워 콩콩 뛰는 것일까.
그립고 그리운, 그리워하고 내가 사랑하던 혜주. 나의 오혜주를 알고 있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내가 아님에도 아직까지 혜주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랑했던 혜주. 너를 알고 기억하고 있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여전히 나의
사랑하는 이를 잊지 않고 간직해 온 사람. 나의 작고 소중한 마음을 언젠가 나처럼 느껴보았을 그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난 반가움에 내 심장이 입 밖으로 마중을 나가려고 그렇게 요동쳤나 보다. 나의 작은 혜주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진 그 사람.
오혜주를 알아?
그 한마디로 나를 뒤흔든 사람. 수현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혜주를 향한 소중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가 혜주를 기억하는 누군가를 찾다가 나를 찾아온 걸까? 너도 나처럼 이따금 혜주가 생각날 때면 가슴을 누르며 그 마음을 홀로 추슬렀을까? 안타깝고 안쓰러운 혜주를 생각하며 혼자 긴 밤을 보냈을까? 혜주가 온 세상에서 잊혀가는 것만 같아 나처럼 미칠 것 같은 감정이었을까? 너도 그런 마음들로 가득 찬 어떤 날이 있었을까?
나는 수현의 손을 붙잡고 혜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수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현은 나와 손을 붙잡고 꽤 긴 시간은 울었다.
혜주가 그때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빨리 친구가 됐을까?
혜주도 나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을까?
혜주는 친구가 많았잖아, 난 별로 특별하지 않은 친구였을 거야. 그래도 나는 혜주가 그리워
혜주가 살아있었다면 우린 혜주를 통해 알게 됐을까?
나도 혜주에게 좋은 친구였을까?
죽기 전에 만나기로 했다며, 혜주는 의외로 친구가 별로 없었어. 인기는 많았지만
온통 오혜주, 혜주.
입을 열면 나오는 그 이름이 혜주, 머릿속에선 몇 번이고 혜주를 곱씹어본다. 혜주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 우리는 손을 붙잡고 바보처럼 혜주만 찾았다.
혜주가 우리의 마음을 느낄까?
바보 같은 말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수현이가 내게 [ 앞으로 혜주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하자고, 이제는 같이 혜주의 이야기를 하자고. ] 말해주었다. 나는 누군가가 내게 그런 말을 해주길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버린 혜주에게, 나는 어떠한 준비도 없이 보내버린 혜주에게, 마지막 인사마저 할 수 없었던 나는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녀에 대한 기억을 말할 수 있는 작은 구원을 기다려왔다고 생각했다.
혜주를 알아? 단 한마디가 그랬다. 그 작은 한마디가 나에게 위로를 주고 작은 구원으로 느껴지도록 모든 걸 바꿔놓았다. 이제 방 안에서 너를 혼자 그리워하거나 너를 찾아 헤매거나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은 너를 상상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 수현이랑 내가 친구가 되어 수현이 네가 얄미워지거나 사소한 다툼이 생겨도 봐줘야지. 나와 함께 혜주를 그리워해 줄 네가 내게 걸어왔으니 내가 꼭 수현이를 봐줘야지.
그리고 너는 잃어버리지 말아야지.
수현이 너는, 혜주처럼 잃어버리지 않게 손 꼭 잡아야지.
나는 사랑했던 그리고 여전히 너무 사랑하는 혜주를 잊지 않고 더 그리워하고 더 선명하게 같은 날 같은 추억을 여러 번 멈추지 않고 곱씹기며 그리워하고 기억하고, 혜주 너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지.
나는 혜주와 보낸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수현이와 만들어가겠지, 혜주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추신. 혜주야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해, 네가 수현이를 내게 보내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
내가 아직도 너를 그리워해서 네가 수현이를 남겨줬다고 생각해, 근데 수현이도 네가 나를 보내주었다고 생각한대. 수현이를 내 곁에 보내줘서 고마워, 나를 수현이에게 보내준 것 역시 고마워
수현이랑 내가 너무 사이좋아도 질투하지 말아 줘, 혜주야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해.
나를 잊지 말아 줘.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