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준이의 생명노트
15화: “준이와 생명의 노트”
이 것 역시 14화와 비슷한 시기의 일화이다.
만약 지금 이 글을 준이가 읽는 다면 자신의 흑역사라고 투덜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기억이고 너무 예쁜 추억이라 글로 남긴다.
준이는 시를 썼었다.
하지만 그의 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와 조금 다르다.
문학의 거창한 틀이나 어렵게 꼬아낸 표현 대신 세상에 대한 그의 호기심이 줄줄이 흐른다.
오늘 준이가 내게 내민 종이에는 세 친구가 있었다.
악어, 개구리, 이빨고래.
제목: 악어
이빨이 뾰족뾰족한 악어야,
넌 뭐하고 노니?
이빨 놀이 하고,
물고기도 먹었고,
개구리도 먹었다.
읽는 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빨 놀이라니 .
단순한 행동 묘사가 이렇게 코믹할 수 있다니.
하지만 이건 단순한 웃음이 아니다.
그 속에는 생명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숨어 있다.
준이는 악어가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하는지 그 하루의 시간을 한 편의 시처럼 기록했다.
우리는 흔히 아이의 관찰을 가볍게 여기지만 준이의 눈에는 세상이 한 편의 드라마다.
물속에서 꿈틀대는 생명 풀밭을 뛰어다니는 작은 포유류 하늘을 날다 떨어진 잠자리까지 모든 존재가 그의 시 속에서 친구가 된다.
다음은 개구리였다.
제목: 개구리
개굴개굴우는 개구리가 파리도 먹고
잠자리도 먹다
개구리야, 어디에 사니
나는 개울가에 살아
개구리야 우리 놀자
이 시를 읽고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누가 개구리에게 놀자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누가 그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까?
준이는 개구리에게 말을 건넨다.
아이의 시는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대화였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아이의 눈으로 세상은 놀이터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이빨고래.
제목 : 이빨 고래
이빨이 악어 닮은 이빨고래야
넌 뭐 먹니
물고기 먹고
오징어 먹어
준이는 이빨고래를 단순한 바다 생물로 보지 않았다.
악어와 연결 지어 이름을 붙이고 습성을 물어본다.
그리고 대답을 상상한다.
아이의 상상력은 제한이 없다.
물속에 사는 고래를 육지의 악어와 연결짓는 기발함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을 좁게 바라보는지 알려준다.
쓰다 보니 뭔가 요즘 유행하는 제이미맘처럼 자꾸 아이의 모먼트를 찾는 도치맘 같다.
그럼 어떤가 내 눈에는 너무나 예쁜 내 아이 아닌가.
준이의 관찰은 시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직접 밖으로 나가 포유류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고라니, 청설모, 검은 큰 다람쥐까지.
그의 노트에는 사진과 이름뿐이다.
나는 그 포유류에 강아지나 고양이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애완용이 아닌 자연에서 만난 포유류를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 었다.
준이는 단순히 자연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시와 노트를 바라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코믹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순수한 감동이 숨어 있었다.
악어의 이빨놀이라니
개구리에게 놀자고 말하다니
이빨고래와 대화를 나누다니.
기발함과 생명에 대한 사랑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동적인 건 준이의 시 속 모든 생명이 존중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의 눈에는 작은 생명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고라니가 숲을 달리는 모습 청설모가 나무 위를 뛰어다니는 순간 검은 다람쥐가 도토리를 쥐고 있는 모습까지.
그가 관찰한 모든 것은 시가 되고 노트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기록은 나에게 묘한 울림을 준다.
우리가 얼마나 바쁘게 살아가며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한다.
나는 우리가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도 많지만 아이로부터 배우는 것은 더욱 많다고 생각한다.
준이는 나에게 웃음을 주고 감동을 주고 기발함을 주었다.
동시에 생명의 존엄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 편의 시처럼 전해주었다.
그의 시를 읽고 그의 노트를 넘기며
삶은 복잡하고 힘들지만 아이의 눈에는 언제나 놀라움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준이는 시를 쓸 것이다.
오늘도 밖에서 작은 포유류를 관찰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시와 관찰 속에서 웃고 감동하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웃음과 감동 코믹함과 기발함이 섞인 준이의 작은 시와 노트는 나에게 큰 울림을 준다.
삶은 이렇게 작은 관찰과 순수한 시선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펼쳐진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준이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며 웃고, 감동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