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랜드 아메리카 Holland America, Koningsdam 호
엄마가 한 달간 밴쿠버 방문을 하시는 동안 가장 중요한 일정은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이었다. 밴쿠버 다운타운의 Canada Place라는 항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알래스카 크루즈를 타기 위해 밴쿠버로 오는 여행객도 많다. 이번에는 코로나 여파로 다른 해에 비해서 현저히 저렴한 패키지가 많이 나와있었다. 물론 출발 이틀 전에 코로나 검사를 해야 하고, 공공장소에서는 마스크를 써야 하지만 오랜만에 엄마도 오셨고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왕복 14일은 너무 길 것 같아, 7일짜리 일정으로 골랐다. 밴쿠버에서 출발해서 알래스카 해변에 있는 몇몇 도시를 들렀다가 다시 밴쿠버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엄마는 예전에 아빠와 함께 케러비안 코스를 갔던 경험이 있지만 나는 처음이었다. 여기서 오래 살아도 왠지 크루즈 여행은 더 나이 들면 가야 할 것 같아 계속 남겨두고 있었다. 올해로 83세인 엄마는 주변 친구들에게 이번 크루즈 여행을 엄청 자랑하고 오신 것 같다. 다들 같이 갈 사람이 있어서 좋겠다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나이 들고 혼자가 되신 분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 편하게 함께 여행 다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란다. 또 아들만 있는 분들은 특히나 이렇게 딸과 함께 여행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많이 부러워하신다. 그러고 보니 나도 딸 둘 엄마인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알래스카 크루즈를 계획하면서 가장 신중했던 부분이 배를 고르는 일이었다. 검색하다 보니 종류가 너무 많은 것이었다. 사이즈도 다르지만 회사마다 조금씩 느낌이 다른 듯했다. 아이들과 함께 하기 좋은 시설물과 프로그램이 많은 배가 있고,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취향의 배도 있었다. 나는 엄마한테 맞춰서 가능한 젊잖고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골랐다. 클래식 연주도 자주 하고, 저녁에 심심하지 않게 공연도 많은 곳으로. 그렇게 고른 배가 홀랜드 아메리카 사의 코닝스담 호였다. 일단 2600명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사이즈이고 만들어진지 몇 년 안된 깨끗하고 모던한 배다.
알래스카가 미국 영토이니 승선하기 전에 미국 입국 심사가 같이 이루어진다. 다른 배에 타는 사람들도 모두 한 곳에서 하다 보니 보안 검색 등등 생각보다 절차가 복잡하고 길었다. 몇 시간에 걸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배에 올라탔다. 12층까지 있는 거대한 건물이다. 이렇게 큰 덩어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계한 사람이 다시 한번 존경스럽다.
체크인 후 방에 가보니 우리 가방이 문 앞에 딱 놓여있다. 객실도 깨끗하고 화장실도 좋고 냄새도 안 나고 만족스럽다. 엄마와 둘이서 한 공간에 오래 있어야 하니 너무 좁으면 좀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방 사이즈도 크고 경치도 좋아서 아주 다행이다.
배도 고프고 9층 뷔페식 식당은 이미 오픈한 상태라고 들었기에 그쪽으로 먼저 올라갔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우리도 한 바퀴 둘러보니 초밥도 있고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다. 만족스러운 첫 식사를 마치고 배를 구경했다. 성격 급한 아이들은 벌써 수영장에서 신나게 물놀이 중이다. 탁구대도 있고 농구대도 있고, 조깅할 수 있는 트랙도 있다.
밥도 맛있고 시설도 좋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배의 프로그램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기대 이상의 수준 높은 클래식 공연도 거의 매일 두 번 정도 있었고, 저녁마다 하는 공연도 정말 훌륭했다. 여섯 명 정도의 댄서들이 어쩜 그렇게 훌륭하고 다양한 무대를 꾸며낼 수 있는지. 조명과 음악과 무대장치 모든 게 어우러져 매 공연마다 감탄을 하며 관람했다. 엄마가 낮잠을 주무시는 시간에는 혼자 게임룸에 가서 퍼즐 맞추기도 하고 기념품 샆 물건들을 하나하나 구경하기도 했다.
크루즈는 지루하다 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누구와 여행하느냐가 엄청 중요하다. 다행히 엄마와는 좋아하는 취향이 좀 비슷해서 의견 충돌은 별로 없었다. 다만 엄마와 너무 오래 붙어있으며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는 점이 날 많이 힘들게 하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바다를 바라보며 멍 때리다 보면 스르르 풀어지곤 했다. 하루 세끼 맛있는 음식을 누군가에게서 공급받는다는 사실도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같은 시간 집에 혼자 있는 남편은 스스로 밥해먹느라 애먹고 있겠지만 나는 오래간만에 부엌에서 해방되어 완벽한 사치를 누렸다.
알래스카 빙하는 배 안에서 구경했고 몇몇 도시에는 정박했지만 우리는 내리지 않았다. 날씨도 춥고 비가 와서 별로 내키지 않기도 했고 옵션 투어를 살펴봐도 괜히 비싸기만 하지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다 생략했다. 엄마는 무릎도 아프고 춥기도 한데 아무 데도 안 가고 배에 있기로 한 결정을 너무너무 잘했다고 매일 얘기하셨다. 친구분들은 다 꼭 옵션 투어를 해야만 하는 줄 알고 재미도 없는데 억지로 하셨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너무 똑똑하게 잘했다며 뿌듯해하셨다. 그 대신 우리는 막 구운 피자 한 접시를 들고 창가에 앉아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사람 구경, 마을 구경을 했다.
무사히 일주일간의 크루즈 여행을 마치고 밴쿠버로 돌아왔다. 엄마는 아직 눈도 잘 보이고 치매 증상도 없고 다리도 건강하고 꼿꼿하게 걸을 수 있어서 여행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아주 흐뭇해하셨다. 주위에 보면 건강 때문에 이런 여행은 꿈도 못 꾸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너무 많다고. 사실은 사실이다. 엄마의 건강을 당연하게 여겨서 그렇지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나도 나의 80대에 이럴 수 있을지 자신 없다.
크루즈 여행을 포함한 밴쿠버 한 달 방문을 마치고 혼자 씩씩하게 한국으로 가셨다. 여행 끝에 일주일 넘게 감기 몸살로 좀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또 금방 기운이 넘치신다. 오늘 아침 통화에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친구들에게 크루즈 자랑한 얘기를 하셨다. 다들 크루즈 재밌었다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하신단다. 우스갯소리로 남편과 싸우고 그냥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는 사람은 봤어도 재미있었다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엄마도 나도 간간이 꺼내볼 추억 하나를 더 만든 것 같아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