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다 (5)

김종직은 소원대로 조정을 떠나 지방 수령으로 내려갔다

by 두류산

5장


어린 임금과 대왕대비가 모든 정사(政事)를 원상의 자문을 통해 결정하니 훈구대신들의 권세가 세조 때나 예종 때에 비해 훨씬 강해졌다. 심지어 원상들은 예종 때 권세가의 집에 드나들면서 사사로운 청탁을 하고 세를 이루는 것을 막기 위해 엄격하게 제한했던 분경의 금지를 해제해 달라고 어린 왕에게 청하였다.

“지금 2품 이상의 집은 분경의 금령(禁令)이 지나치게 엄중하여 비록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 사람일지라도 서로 교제할 수가 없으니, 태평 세상의 좋은 일이 아닙니다. 거두어 주소서.”

임금은 한명회와 신숙주의 청을 허락하였다.


김종직은 답답한 현실에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도성 안을 산책하였다.

원상인 훈구대신 김국광의 집을 지나면서, 지방의 특산물을 실은 우마차가 줄을 이어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경상도 병마평사 때에도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었는데, 어린 임금이 등극하고는 뇌물을 주고받는 것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김종직은 조정에 있는 것이 싫어져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붓을 들었다. 낙향하여 제자를 가르치며, 일흔을 넘긴 모친을 가까이서 봉양을 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임금에게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임금과 정희대비는 김종직의 사직상소를 원상에게 보여주어 의논하게 하였다. 신숙주가 나서서 아뢰었다.

"조정의 젊은 선비들 중에 김종직만 한 학문과 문장이 없습니다.”

임금으로부터 ‘불가(不可)하다’는 답을 받고 두 번째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또 거절당했다. 연로한 어머니의 봉양을 내세우며 거듭하여 세 번째 사직을 청하니, 임금은 드디어 고향과 가까운 함양군수로 나가게 허락하였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가게 되자, 신숙주가 한탄했다.

"김종직과 같은 인재가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된다니,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로다.”


신숙주는 김종직이 승문원에서 벼슬을 할 때부터 눈여겨보아 왔다. 앞으로 조선의 학문을 이끌 것으로 주위의 대신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고 격려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손자인 신종호에 이어 신용개를 김종직에게 보내 배우게 하였다.

김종직은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성삼문과 신숙주의 높은 학문을 흠모하였다. 신숙주는 세종대왕에게 큰 은혜를 받았고 이것은 당시 유생들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입에 오르내렸다. 신숙주가 집현전에서 숙직으로 밤새 책을 읽다가 새벽녘이 되어 잠이 들었을 때, 세종이 집현전에 들렸다가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신숙주에게 덮어주었다. 김종직은 성균관 유생 시절에 군신 간의 이런 미담을 듣고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토록 세종대왕에게 사랑받던 신숙주가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지 않고 수양대군의 편에 붙은 것을 보고 김종직은 분노하였다.

벼슬길에 올라 신숙주를 곁에서 보니 학문 수준이 높고 신진 선비를 대하는 도량이 넉넉하여 점차 존경하게 되었다. 신숙주가 대학자이자 경륜 있는 원로대신으로 조정에서 균형을 잘 잡아주고 경세제민(經世濟民)에 힘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 조선에 신숙주 같은 학자가 살아남은 것도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훗날 신숙주가 죽은 후 문집을 만들 때, 신숙주의 손자인 제자 신종호의 부탁으로 김종직은 문집의 서문을 썼다.


김종직은 드디어 조정을 떠나 고을 수령으로 도성을 떠나게 되니 마음이 날듯이 가벼웠다. 어머니가 벼슬을 권유하면서 하시던 말이 떠올랐다.

"네 말대로 세상에 도(道)가 없다면 왕을 가까이 모시기보다는, 지역의 수령이라도 되어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도 배운 학문을 실천하는 보람이 있을 것이다. 지방의 수령이 되면 좋은 제자를 만날 기회도 많아질 것이다. 도학(道學)을 배운 제자들을 조정에 많이 진출시켜 군자의 기운이 가득하고 백성을 위하는 나라를 만들려던 아버지의 뜻을 이을 수 있다.”

김종직은 꿈꾸던 일이 실현되니 가슴이 설렜다. 김종직은 지방수령으로서 고을을 다스릴 때, 송사를 공평하게 처리하고 백성들이 감당할 부역과 조세를 공정하게 하고, 기근으로 어려운 상황이 되면 백성을 구제하여 대동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포부로 가득 차 있었다.


김종직은 함양으로 내려가면서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임금이 김종직에게 물었다.

"경은 백성을 어떻게 다스리겠는가?”

"임지에 내려가면 전하께서 강조하시는 수령칠사(守令七事)를 마음에 새겨, 전하를 대신하여 백성을 잘 살피겠습니다. 덕을 근본으로 고을을 다스리고, 하늘의 해가 차별하여 비추지 않듯이 온 고을 백성을 고루 살펴, 공정하고 치우침이 없는 정치를 하겠습니다.”

수령칠사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의 통치에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이었다. 그 내용은 농상성(農桑盛, 농업과 잠업을 장려하고), 호구증(戶口增, 호구를 늘리며), 학교흥(學校興, 학교를 일으키고), 군정수(軍政修, 군정을 안정시키며), 부역균(賦役均, 부역을 균등하게 하고), 사송간(詞訟簡, 소송을 간결하게 하며), 간활식(奸猾息, 향리의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하여 부정을 방지함)의 일곱 가지였다.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령의 임무는 칠사(七事)에 있다. 임지에 도착하거든 그대의 마음을 다하도록 하시오.”

김종직은 고을 수령에 임하는 다짐을 아뢰었다.

"어진 정치를 베풀어 도(道)가 행해지고, 노약자와 병자들이 부양을 받으며, 길에 재물이 떨어져도 줍지 않고, 죄를 짓는 사람이 없다는 대동사회(大同社會)를 만들겠습니다.”

"마음을 세운 것이 그와 같으면 거의 이루어질 것이오.”

임금은 김종직의 말에 자신이 어진 정치를 베풀어 온 나라가 대동사회를 이루는 모습을 상상하며 마음이 뿌듯했다.

성종은 물러나는 김종직의 모습을 보며, 연로한 모친 때문에 가까이 두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성종은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받아 하직인사를 온 지방관들에게 수령칠사(守令七事)를 강조했다. 성종은 신창(新昌, 지금의 충남 아산지역) 현감으로 부임하고자 하직 인사를 하러 온 무과출신 김숙손에게 수령칠사를 물었다. 김숙손은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인 채 자리만 긁고 있었다.

성종은 분노하며 이조에 김숙손의 임명을 취소하라고 명하였다.

"비록 칠사(七事)를 안다 하더라도 백성을 잘 다스리기가 어려운데,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과인을 대신하여 좋은 정치를 해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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