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장군은 참으로 억울하게 죽었을까?

당시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을 찬찬히 살펴보자

by 두류산

백성들은 영웅 남이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1468년 예종 즉위년 10월 27일.

임금은 백관들 앞에서 남이와 강순 등을 저자에서 환열(轘裂) 하고 7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명하였다.

환열은 거열(車裂)이라고도 하며,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서 끌어당겨서 인체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었다. 효수는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것을 말했다. 예종은 그날 교서(敎書)를 내려 역모를 사전에 막은 것을 기뻐하며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다.


남이와 강순 등은 군기감(軍器監, 지금의 서울시청 부근) 앞에서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한 후 이들의 머리가 이레 동안 효수되었다.

백성들은 전쟁 영웅 남이 장군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당황했다.

"남이장군은 역적 이시애를 토벌하였고, 여진족을 물리친 조선 최고의 호걸이 아닌가. 명문가 출신에다 전쟁 영웅으로 나이도 젊어 앞길이 구만리인데, 뭐가 답답해서 역모를 했겠어? 이건 틀림없이 무고야.”

"노비의 자식인 유자광이란 놈이 자신이 모시던 남이장군을 언감생심 시기하여 저 지경이 된 것이지. 역시 출신은 못 속이는 법이야.”

"상놈이 더러운 입으로 나라의 영웅호걸을 능멸하고 절단을 내다니, 말세로군 말세야.”


백성들은 영웅으로 환호했던 남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 죽음이 천출인 유자광의 고발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더욱 가슴에 사무쳤다.

유자광은 양반 아버지와 노비 신분의 어머니가 낳은 얼자(孼子)였다. 서자(庶子)는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인 양인(良人) 신분에 속하는 첩이 낳은 자손을 말했는데, 서자와 얼자를 합해서 서얼(庶孼)이라고 했다. 서얼은 양반 사회에서 무시를 당했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등 신분상의 제약이 많았다.


이런 백성들의 마음을 담아 야사(野史)는 남이가 유자광의 무고로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후세의 사람들도 남이를 죄가 없는 데 억울하게 죽은 비극적 영웅으로 여겼고, 조선의 무속인은 억울하게 죽은 귀신으로 중국의 관운장과 함께 남이장군을 신으로 모셨다.


과연 남이 장군은 무고에 의한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까?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남이의 역모사건은 명백히 실패한 반란이었다.


훗날 유자광이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수많은 선비들이 죽게 되자 사림들은 그를 극악무도한 간신으로 욕하였다. 김종직의 제자 남곤은 동문들이 죽은 원한을 가지고 《유자광전(柳子光傳)》을 집필하여 후세에 남겼다. 《연려실기술》 등 야사(野史)는 이런 영향을 받아, 남이의 역모사건은 유자광의 모함으로 남이를 죽게 한 날조된 옥사라고 기록했다.


야사(野史)는 남이 장군이 ‘북정가(北征歌)’라는 시를 지었는데, 남이를 시기한 유자광이 이 시를 과장하여 그를 무고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남이 장군이 여진족을 정벌한 후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오면서 지었다는 북정가는 남이의 웅장하고 거침이 없는 기상을 담고 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白頭山石摩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頭萬江水飮馬無)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안히 못한다면 (男兒二十未平國)

후세에 누가 나를 대장부라 말하겠는가. (後世誰稱大丈夫)'


남이의 북정가를 유자광이 ‘나라를 평안히 못하면’이라는 뜻의 ‘미평국(未平國)’ 대신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이라는 뜻의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꾸어, 남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 증거라고 무고하여 남이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정가 이야기는 남이의 역모에 대한 심문 과정을 포함하여 조선왕조실록의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고 있으니,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과연 남이 장군은 무고에 의한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까?

당시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을 찬찬히 살펴보자.


(다음 편에 계속)







(남이장군 초상화 사진 출처)

https://sskn1324.tistory.com/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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