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의 필화(筆禍) 사건 (4)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왜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을까

by 두류산

김일손은 조의제문을 왜 사초에 올렸나


김종직이 단종을 애도한 조의제문을 위험한 줄 알면서도 간직한 것은 불의(不義)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초나라의 의제(義帝)를 위한 제문이란 뜻으로 ‘조(弔) 의제문義帝文)’이라고 지었으니 단종에 대한 제문임을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김종직은 이날 밤 없애버리지 않은 제문으로 인해 훗날 자신은 물론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참혹하게 목 베임을 당하게 되는지 짐작 초자할 수 없었다.


왜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성종 때의 사관이면서 조의제문을 세조실록도 아닌 성종실록을 쓰기 위한 사초에 올렸을까? 또한 김일손도 조의제문의 폭발성을 잘 알았을 터인데 어찌하여 사초에 올렸을까?


김일손은 스승의 글인 조의제문을 접하고, 이 글이 중국의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 아니라 실상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무참하게 죽은 단종을 애도하는 글임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김일손이 세조에 이어 예종, 성종의 두 임금이 지난 과거의 역사임에도, 세조의 왕위 찬탈과 사육신의 상왕 복위 운동, 단종의 죽음 등의 역사적 사실을 세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일손은 《육신전》을 써서 사육신의 충절을 알린 동문 선배로 훗날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남효온과 친하게 지내면서 단종과 사육신의 죽음을 함께 애통해했다. 김일손은 남효온과 함께 김시습과 원호 등 생육신을 차례로 만나 단종과 사육신의 슬픈 역사를 들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김일손은 동문 선배였던 충청도 관찰사 조위에게서 문집이 간행되기 전에 모아두었던 김종직의 글들을 빌려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연산 4년 9월 6일, 조위가 국문장에서 진술한 기록이다.

“신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돈을 모아서 김종직의 문집을 간행하려고 했는데, 마침 초상을 당하여 정석견에게 보내서 간행하게 하였습니다. 갑인년에 신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김일손이 충청도 도사(都事)가 되어 와서, 김종직의 문집을 보게 해 달라 하므로 신은 내주었을 뿐이며, 일찍이 함께 의논하여 편찬한 적은 없사옵니다.”

조위는 김종직의 처남이자 제자였다. 김종직이 죽고 조카인 강백진이 김종직의 유고를 모아서 문집으로 발간하기 위해 조위에게 부탁했고, 조위는 역시 김종직의 제자였던 전라도 관찰사인 이인형에게 문집 간행을 의뢰했다


연산 4년 7월 12일.

김일손은 함양에서 동문 선배인 정여창과 함께 있다가 압송되어 도성에 끌려왔다.

연산군은 김일손을 직접 국문을 하였다.

"네가 벼슬에 오른 지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세조의 일을 《성종실록》에 쓰려는 의도는 무엇이냐?”

김일손은 역사는 당대뿐만 아니라 선왕의 일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역사에는 ‘이에 앞서’라는 말도 있고, ‘처음에’라는 말이 있으므로, 신이 또한 감히 선조(先朝)의 일을 쓴 것이옵니다.”


이튿날에도 김일손은 사관의 책무를 말하며 바른 기록이야말로 임금과 국가에 대한 충성의 발로임을 강조하였다.

“순(舜) 임금의 아비 고수와 우(禹) 임금의 아비 곤이 모두 악덕이 있었는데, 사관이 그 악행을 숨김없이 적었으며, 또 공자께서 《춘추》를 지을 때 당대 임금의 조그마한 잘못도 기록하였습니다. 세조 대왕은 신이 섬기던 임금이 아니시므로, 꺼리거나 두려워하여 피하지 않고 당시의 지나친 처사를 모두 썼습니다.” (연산군일기, 연산 4년 7월 13일)


그럼, 어떻게 해서 김일손의 사초가 애초에 문제가 되었으며, 급기야 조의제문에 까지 불똥이 튀었을까?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죽은 후 김종직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읽었지만 쉽게 그 진의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 성종도 읽어보았으나 은밀히 숨겨진 뜻을 알아채지 못했다.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 2년 6월 10일의 실록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성종 대왕께서 몸소 조의제문을 보시고도 오히려 혐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위의 글은 예문관의 사관들이 임금에게 올린 상소인데, 성종이 김종직의 쓴 조의제문의 숨겨진 뜻을 알았지만 눈감아 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종 대왕께서 알지 못하신 것이 아니로되 죄를 안 주신 것은 반드시 다른 뜻이 있으신 것인데, 뒷날 대신들이 위(연산군)의 뜻을 짐작, 영합하고 유도하여 김종직 등을 무거운 죄로 얽어 꾸며대었으니, 이는 성종을 그른 임금으로 만든 것입니다.”


성종이 읽어본 것은 사실이다. 실록은 이를 증거 한다.

김종직의 처남이자 제자인 조위가 국문장에서 진술한 기록이다.

“김종직이 죽은 뒤 신이 도승지로 있을 적에, 강백진이 김종직의 글들을 신에게 부쳐 간행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때 성종께서 명하여 김종직의 유고(遺稿)를 들이라 하시므로, 신은 김종직의 시문 17권을 올렸습니다.” (연산군일기, 연산 4년 9월 6일)

강백진은 김종직의 제자이자 누나의 아들인 조카였다. 김종직이 죽었을 때 아들이 7세밖에 되지 않아 당시 함안 군수 강백진과 강중진 형제, 제자이자 처남인 조위가 상가 안팎의 일을 지휘하고 관장하는 책임을 맡아 일하였다.


하지만 성종이 조의제문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었던 것은 상소에 나오는 것처럼 알고도 모른 체하여 죄를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진의를 몰랐을 것임이 합리적인 추정일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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