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화(御賜花)냐, 금은화(金銀花)냐?
대한민국 최악의 입시부정사건은 2005년 대학수능시험에서의 부정행위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100여 명이 넘는 수많은 수험생들이 시험성적을 올리기 위해 부정행위를 하다 적발되었다. 당시의 부정행위는 대리시험을 치르거나 휴대전화를 이용해 답안을 백여 명의 공모자에게 전송하는 방식 등이었다.
정부는 이 건을 교훈 삼아 2006학년도 수능시험부터 부정행위 단속을 위한 감독체계를 강화했다. 원서접수 때부터 대리 시험을 방지하기 위해 본인 확인을 위한 사진의 크기를 확대하고, 시험실 인원도 관리하기 좋게 줄였다. 또한 모든 전자기기의 시험장 반입을 금지하고 적발 시 시험성적 전체를 무효 처리하도록 하였다. 대리 시험 방지를 위해 답안지에 필적확인란 문구를 쓰는 방안도 도입하였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시험이 있는 곳에 부정의 유혹이 없을 수 없었다. 시험이 경쟁적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최악의 과거 부정 사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의 제6대 임금 단종은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었고, 죽어서 노산군으로 불렸다. 하지만 의리와 예의를 중요시하는 성리학을 배운 조선의 선비들은 오랜 세월 동안 단종을 국왕으로 복권하여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움직임을 가졌다. 연산군이 일으킨 수많은 선비들의 피를 부른 무오사화도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을 쓴 김종직의 글을 제자들이 사초에 올리려다 발생한 것이었다. 연산군이 폐위된 후 중종 때 사림에 의해 단종의 복권 논의가 본격적으로 나왔으나 임금은 증조할아버지인 세조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는 일이라 복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단종의 복권 문제는 세조의 후손인 조선 국왕들에게 정치적인 금기가 되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사림의 열망으로 남았다. 숙종 24년 11월 6일, 단종은 사망한 지 240여 년이 지나 비로소 복권되었다.
숙종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은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었으므로,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림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숙종과 신하들은 단종의 복위를 축하하기 위해 임시 과거시험을 개최하였다.
"단종을 복위시킨 것은 진실로 큰 경사이다. 임금이 즉위한 뒤에는 으레 증광시(增廣試)를 시행하는데, 국왕의 칭호를 드린 것도 즉위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특별히 증광시를 시행하게 하라." (숙종실록, 재위 25년 5월 13일)
증광시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 시험이었다.
숙종 25년 10월 21일, 조정은 34명의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합격자가 발표된 이후, 도성에서는 ‘어사화냐, 금은화냐?’하는 과거시험의 부정을 비꼬는 동요가 유포되었다. 과거 합격의 징표인 어사화를 돈으로 얻었다고 풍자하는 노래였다. 또한 과거 비리를 조롱하며 지은 시가 도성의 유생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백지로 시험지를 내어도 홍패지(紅牌紙), 과거 합격증)를 받고,
머리에 어사화 꽂고 길에서 쳐다보는 이에게 으스대네.
도적의 소굴에서 밤중에 휘파람 소리 들리니
저 도적의 무리들도 깨끗하다 해야 할까' (숙종실록, 재위 26년 1월 20일)
사간원 정언(正言) 이탄(李坦)은 과거 부정에 관한 풍문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탄은 숙종 21년 과거에 장원급제한 인재로 바른말을 잘하는 기개 있는 대간이었다. 이탄은 자신이 과거 부정을 막아야 할 감시관으로서 부정을 막지 못한 책임이 있음에도, 과거 부정에 대한 심상치 않은 소문을 임금에게 알렸다.
"신(臣)이 이번 과거에 감시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과거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니 사람들이 ‘학문에 어두운 사람이 합격하였고, 또 표(表)를 지어 올렸는데 부(賦)로 합격된 경우가 있었으니, 대리시험을 쳤거나, 남의 답안을 베끼거나 남의 글을 훔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하는가 하면, 심지어, ‘차비관(差備官)이 피봉(皮封)을 바꾸어 이름을 속였다.’는 등의 이야기도 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문을 다 믿을 수는 없으나, 단정적으로 이런 일이 없었다고 보장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엄밀히 조사하여 그 실상을 알아낸다면 뒷 폐단을 근절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해당 부서로 하여금 과거 급제자의 시권(試券, 과거 응시자들이 제출한 답안지)을 거두어 부정 여부를 명백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숙종실록, 재위 25년 11월 1일)
피봉(皮封)은 과거 응시생이 시험 답안지의 끝부분에 응시자의 이름과 사조(四祖·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 등의 신상을 적고, 그 위를 연이어 접어서 풀로 봉한 것을 일컬었다. 차비관은 피봉 부분과 시험지 부분에 각각 일정한 글자를 써넣어 표기한 다음 피봉을 시험지와 분할하여 따로 보관하였다. 과거 응시자의 신분을 채점자가 알지 못하게 하여 실력만으로 공정하게 합격자를 판단하기 위한 부정방지 조치였다.
조선시대의 과거는 여러 사람으로 구성되어 관리되었다. 기능상 크게 고시관(考試官), 감시관(監試官), 차비관(差備官)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고시관의 임무는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답안을 채점하여 합격자를 선정하는 일이었다. 감시관의 임무는 시험부정을 적발하는 일이며, 사헌부 및 사간원에서 차출되었다. 차비관은 과거시험에 종사하여 과장(科場)을 관리하는 관원들을 말하며, 여러 부서에서 차출되었다.
이탄의 폭탄 발언에 조정은 술렁거렸다. 숙종 25년 11월 5일, 임금은 이탄이 아뢴 과거의 부정에 대해 대신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대신들의 의논은 분분하였다. 우의정은 대간이 소문만을 가지고 아뢴 것으로는 과거 부정 여부의 실태를 살피기 어렵다고 아뢰었다. 다른 대신들은 시험을 무효화하고, 재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하는 이도 있었고, 차비관들을 옥에 가두고 엄중히 조사해야 한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숙종은 문제를 제기한 사간원 정언 이탄을 불렀다.
"그대는 들은 대로 진달 하도록 하라."
이탄이 아뢰었다.
"과거가 끝난 뒤 사람들의 말이 매우 심하였기 때문에 아뢴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급제자 이성휘가 표(表)를 지어 올린 것을 보았는데, 부(賦)로 합격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급제자 송성의 시권이 바꿔치기되었다는 소문입니다. 송성은 본래 학문에 어둡다고 일컬어지므로, 감히 조사하여 처리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부(賦)는 미사여구를 구사하여 현란한 문장을 짓는 시험이고, 표(表)는 제갈량의 출사표처럼 임금에게 자신의 의견을 올리는 시험이었다.
임금이 재차 물었다.
"이밖에 달리 의심스러운 일은 없었는가?"
이탄이 아뢰었다.
"박필위 또한 연소한 사람으로 아직 글을 제대로 짓지 못하는데 합격되었다고 합니다만, 이는 떠도는 말이어서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임금은 이탄의 말을 듣고, 의금부에 명하여 이성휘와 송성을 엄하게 조사하라고 하였다. (숙종실록, 재위 25년 11월 5일)
의금부가 이성휘와 송성을 잡아 옥에 가두고 조사에 들어가게 되자, 부정에 개입한 명문가들은 이를 조기에 차단하려고 했다. 이성휘는 재상 이선의 아들이고, 박필위는 재상 박세채의 손자였다.
사헌부 지평 권업이 이탄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사간원의 간원(이탄을 말함)이 당초 과장을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으면 시험장 안의 모든 것을 일체 살펴보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급제자를 발표한 뒤에서야 부정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신은 이를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만일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다면 곧바로 조사하기를 청해야 하지만, 만약 실체가 없는 사실을 고했다면 나라 사람의 의혹만 일으키는 것이니 마땅치가 못합니다." (숙종실록, 재위 25년 11월 13일)
심지어 사간원의 동료인 박견선이나 사헌부의 장령 이광저도 이탄의 비판에 가담했다.
사관은 조정의 여론을 역사에 남기며 이들을 비난하였다.
‘부정행위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대개 권세가의 자제들인데, 사간원의 박견선과 사헌부의 이광저 등의 무리가 사사로운 부탁을 받고서 간혹 쓸데없는 말로 조사를 저지시키기도 하고, 또한 중요한 의논을 정지하여 임시변통으로 모면하기도 했으므로,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놀랍게 여겼다.’ (숙종실록, 재위 25년 11월 17일)
(다음 편에 계속)
(그림 출처)
김홍도, 평생도 중 삼일유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