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답안을 바꿔치기하여 남의 합격을 가로채기도
원래 과거제도는 귀족들이 세습하여 관직을 차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관리의 선발 기준이 가문의 혈통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을 중요시하자는 것이었다. 신분이 아닌 오직 능력으로만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공정한 선발이 과거제도의 핵심적 요소였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입신양명해야 사람 구실을 했다. 오죽하면 퇴계 이황도 과거에 떨어지고 낙향해 방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밖에서 '이서방!'하고 부르는 소리에 자신을 부르는가 문을 열었더니, 종을 부르는 소리임을 확인하고 과거에 붙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더하게 되었다고 했겠는가. 퇴계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학문이 높아도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양반가는 아들이 다섯 살쯤 되면 천자문을 가르치며 과거시험을 준비시켰다. 과거 합격자의 평균 연령은 30대 후반이니, 대개 30년 이상을 공부해야만 합격이 가능한 것이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문과에 급제하는 영예를 누린 사람은 대략 1만 5천 명 남짓인데 평균으로는 매년 30명 정도의 합격자 배출에 그쳤다. 벼슬길에 오르는 관리의 길 문턱에 놓인 과거가 엄청나게 어려운 시험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부정의 유혹은 그만큼 커졌다.
과거제도는 국가가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이므로 나라의 장래가 걸린 일이었다. 그러니 가장 공정하고 흠이 없어야 할 과거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발생한다면 적절한 인재 충원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물론, 국가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는 등 심각한 위해를 끼치게 될 것이었다.
숙종 시절 최악의 과거 부정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자. 단종 복위를 축하하며 치른 임시 과거시험의 급제자 이성휘와 송성은 합격의 기쁨을 누린 지 보름 만에 의금부 옥에 갇혔다. 의금부의 조사를 시작으로 부정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 대상은 확대되었고, 증광시 과거 부정의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의금부 조사로 차비관이 부정에 가담하여 피봉을 넣어둔 상자를 함부로 뜯고 미리 알아둔 합격자의 피봉을 찾아 공모한 자의 피봉으로 바꿔치기 한 사실을 밝혀내었다. 합격된 답안의 이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합격을 가로채는 수법을 쓴 것이었다.
의금부에서 공모자 홍수우가 자백하였다.
"일찍이 박태희와 알고 지냈는데, 하루는 박태희가 와서 말하기를, ‘나의 아들 박필위가 회시(會試)에 나아가는 데, 그대가 과장에 들어가면 돌보아줄 수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뒤 또 말하기를, ‘오석하와 그대를 이미 차비관에 임명되도록 도모하여 놓았으니, 모쪼록 서로 상의하여 돌보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민시준과 정순억이 피봉(皮封) 4장을 빼내었는데, 민시준은 그 가운데 3장을 가지고 박필위·이성휘·이수철에게 나누어 주었고, 1장은 심익창에게 내주었습니다." (숙종실록, 재위 25년 12월 30일)
사람들은 과거 부정이 남의 글을 베껴 쓰거나 대신 답안을 작성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합격으로 채점된 된 답안지를 통째로 바꿔치기 한 전대미문의 간 큰 부정행위에 놀랐다. 사관도 탄식하며 기록을 남겼다.
‘대체로 대과나 소과의 시험지 끝에 응시자의 성명·나이·거주지·본관·사조(四祖)를 쓰고는 접어서 풀로 봉하고, 밖에 ’근봉(謹封, 삼가 봉함)‘이라고 쓰는 것은 옛날 피봉에 쓰는 제도인데, 근래에 또 고시관(考試官)이 몰래 뜯어서 사사로운 정으로 부정으로 채점을 할까 염려하여 아예 피봉을 절단하여 분리해 두는 규정을 두었다. 차비관을 시켜서 시험지와 피봉에 글자를 써넣어 표시한 후, 분할하여 감독하며 맡아서 지키게 했다가, 채점을 마친 후 분할된 피봉을 가져와 합하게 하였다. 과거의 부정을 방지하는 도리가 이같이 엄밀하게 정해졌는데도, 별도로 준비한 피봉을 합격한 다른 사람의 시권과 몰래 합하게 하고, 이름을 바꾸어 함부로 합격을 차지하니, 실로 예사로운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숙종실록, 재위 26년 1월 20일)
과거 부정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부정의 사실도 드러났다. 시험관의 부정채점이 밝혀진 것이었다. 조사 결과 과거 응시자 심익창이 시험 답안의 첫 문장을 쓴 쪽지를 정순억을 통해 인척이며 채점관인 홍문관 수찬 조대수에게 몰래 전해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심익창의 자백으로 드러났다.
"조대수와는 혼인 관계로 해서 서로 친한 사이이므로, 쪽지를 보고 채점할 때, 내 답안이 나의 글인 것을 알아차린다면 혹시 도움이 없지 않았을 것이고, 비록 도움은 주지 않더라도 반드시 고발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문장의 첫머리를 쓴 쪽지를 보내었습니다." (숙종실록, 재위 26년 7월 28일)
정순억은 과거 비리에 재물이 거래되었음을 자백했다.
“김시흥이 은을 싼 봉투 한 덩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송성이 준 것인데, 과거에 합격을 시켜주면 나누어 가지면 된다.’ 하였습니다.” (숙종실록, 재위 26년 1월 20일)
사관은 정순억의 자백을 실록에 기록하면서 한탄하였다.
“과거 합격자가 발표하니, 동요에 이르기를, ‘어사화냐, 금은화냐? (御賜花耶 金銀花耶)’하는 노래가 있었는데, 여러 자백에 은이 등장하니 그 말이 과연 맞게 되었다.” (숙종실록, 재위 26년 1월 20일)
조정은 과거 부정에 대해 철저한 조사 끝에 법에 따라 엄하게 형을 집행하였다. 숙종은 과거 부정의 엄중함을 알고 의금부에 몸소 나가 죄인들을 심문하여 각각 엄중한 벌을 내렸다. (숙종실록, 숙종 27년 5월 13일)
피봉을 바꾸어 합격자 바꿔치기의 과거 부정을 획책한 이성휘와 박필위, 그리고 이를 도운 공모자들은 제주도와 흑산도 등 먼 섬의 관아에 노비로 내치는 가장 무거운 처벌을 받았으며, 부정 채첨을 도모한 시관 조대수는 파직을 당하고, 국경지대의 군사로 복무하는 형벌을 받았다. 또한 과장(科場)의 관리의 책임을 맡았던 자들도 부정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역사는 기묘년에 일어난 과거 부정행위를 다룬 옥사(獄事)를 기묘과옥(己卯科獄)이라 하였다. 조정의 대신들은 부정의 문제가 발생하였던 증광시의 문과 급제자 전원의 합격을 무효화하는 파방(罷榜)을 할지를 둘러싸고 임금 앞에서 격론을 벌였다.
임금은 결국 과거시험을 무효화하는 극단적인 조처를 취하였다.
"이번 일은 비상(非常)한 변고이므로, 일반적인 예(例)로 처리할 수 없다. 파방해야 한다는 의논이 옳다고 할 만하니, 파방하라." (숙종실록, 재위 26년 1월 7일)
파방 조치로 부정에 개입하지 않은 합격자는 물론, 피봉 바꿔치기로 피해를 본 자들 모두가 급제가 취소되거나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숙종은 수년 후 부정에 직접 관련이 없었던 자들과 억울하게 합격을 바꿔치기당한 자들에 대해 다시 합격을 시켜주었다.
숙종 36년 6월 16일, 대사간과 대간들이 아뢰었다.
"기묘과옥에서 이미 죄인이 밝혀져서 억울하게 불합격된 자들의 사정이 드러났으니, 다시 합격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숙종이 여러 신하들의 의견도 같음을 알고 말했다.
"단종을 복권한 일은 더할 수 없이 큰 경사인데, 이를 축하하는 과거에서 불행하게도 부정이 있어서 문과를 파방하였으니, 이는 심한 흠결이었다. 시관(試官)을 죄주고 과거 응시자를 죄주되, 파방(罷榜)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엄청난 부정으로 인하여 경솔하게 과거를 없는 것으로 하였으므로, 마음이 항상 좋지 않았다. 기묘년의 문과를 특별히 복과 하되, 이후에도 과거에 부정행위가 있어 비록 파방의 의논이 있다 하더라도 부정을 저지른 시관과 과거 응시자를 엄하게 벌을 주되, 파방은 하지 않음이 옳을 것이다." (숙종실록, 재위 36년 6월 16일)
과거 부정이 있은 후 조정은 과거제도의 허점을 보완하는데 힘썼다. 부정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벌을 더욱 엄하게 하였고, 과거장의 허점도 보완하였다. 기묘과옥이 있은 후 실시된 과거에서는 숙종은 철저한 시험 관리를 위해 차비관을 각별히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 관원 중에 차출하는 등 만전을 기하라고 명하였다.
"내일은 바로 생원진사시가 있다. 과옥(科獄)이 있은 후이니, 모든 과장(科場)의 차비관은 가려 뽑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봉미관(封彌官)은 삼사(三司)에 근무하는 사람으로 차출하라." (숙종실록, 재위 28년 2월 9일)
봉미관은 과거를 실시할 적에 과거 응시자가 답안지 끝에 응시자의 성명·생년월일·본관·사조(四祖) 등을 쓰고 봉하여 붙인 피봉을 분리하는 일을 맡았던 관리를 말했다.
기묘과옥에 대한 의혹을 처음 임금에게 아뢰었던 이탄은 감시관으로서 부정을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으나, 숙종은 곧 복직시켰다.
도승지가 아뢰었다.
"이번 과장(科場)에 대해 사람들의 말이 시끄러운데,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고, 이탄 혼자서 아뢰었습니다. 설혹 감시관으로 시험장의 일을 방지하지 못한 실수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한 일은 장려할 만하고 죄를 줄 수는 없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받아들여, 특별히 서용(敍用)하라 명하여, 이탄은 사간원 정언으로 곧 복귀하였다. (숙종실록, 재위 26년 2월 6일과 11일)
서용은 죄를 지어 면직되었던 사람을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하는 것을 말했다.
조선왕조 초기부터 과거 비리는 존재하였고, 부정행위는 여러 가지 행태를 보이며 지속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새롭게 진화된 과거 비리가 발생할 때마다 규정과 제도를 보완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은 출신 가문을 따지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500여 년 동안 존속시킬 수 있었다.
한국의 대학 입시제도가 미국의 명문대학들과 달리, 출신 집안의 배경으로 합격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은 고려와 조선의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과거제도의 DNA가 우리 사회에 살아 움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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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출처)
김홍도, 평생도 중 삼일유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