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후, 사관들의 기록은 위축되었고 학문하는 풍토는 크게 상했다
김일손의 사초를 문제 삼아 고발한 사람은 성종실록 편찬의 고위 책임자인 실록청 당상 이극돈이었다. 사초에 세조를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극돈이 이 사실을 유자광에게 이야기했고, 유자광은 연산에게 보고하였다.
연산은 김일손을 곧바로 잡아들이라고 했다.
김일손은 당시 동문 선배인 함양의 정여창을 방문하여 같이 지내고 있었다. 김일손은 한양으로 압송될 때 이극돈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짐작했다.
연산 4년 7월 12일.
연산군은 김일손을 함양에서 압송하여 끌고 온 의금부 낭청 홍사호에게 김일손이 도중에 말한 것을 빠짐없이 보고하게 하였다. 홍사호는 김일손이 이극돈으로 인해 화를 입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고했다.
"신 등이 처음 김일손을 구속할 적에 그의 말이 ‘이는 필시 《실록)》에 대한 일일 것이다.’ 하므로, 신 등이 ‘어째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한즉 김일손은 ‘나의 사초에, 이극돈이 세조 때에 불경을 잘 외운 것으로 벼슬을 얻어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정희왕후(세조의 왕비)의 상(喪) 중에 장흥의 관기(官妓) 등을 가까이한 일을 기록하였는데, 듣건대 이극돈이 이 조항을 삭제하려다가 못했다고 한다.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다.”
김일손의 짐작은 사실이었다.
연산군 때, 이극돈이 죽었을 때 사관이 그를 평가한 기록이다.
“이극돈이 일찍이 《성종실록》을 수찬 하면서 김일손이 자기의 악행을 쓴 것을 보고 깊이 원망을 품고 있다가 선왕(先王, 세조를 일컬음)의 일에 결부해서 유자광을 사주하여 이를 고발하게 했다. 이로 인하여 사류(士類)를 죽이고 귀양을 보내기를 매우 혹독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이 무오사화(戊午士禍)에는 이극돈이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의 원흉이라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연산 9년 2월 27일)
또 다른 실록의 기록에서도 사림들은 무오사화의 원인제공을 한 이극돈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관은 논한다. 이극돈이 춘추관 지사가 되어 실록을 쓸 때 김일손이 쓴 것을 보고는 바로 유자광에게 일러주었다. 자광이 그 일을 가지고 죄목을 구성하여 연산군에게 올리자, 연산군은 즉시 김일손을 가두고 계속 어진 사대부를 대죄에 얽어 넣어 매우 많이 주살하였으니, 이(무오사화를 일컬음)는 실로 이극돈이 일으킨 일이다.” (중종실록, 중종 13년 4월 28일)
김일손의 사초에 적혀있던 조의제문은 처음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지 김일손이 세조에 대한 나쁜 소문을 사초에 적어 놓은 것을 문제 삼았다.
연산 4년 7월 12일.
연산군은 붙잡혀온 김일손에게 세조에 대한 나쁜 말을 사초에 기록한 사실을 추궁했다.
"네가 《성종실록》에 세조 때의 일을 기록했다는데, 바른대로 말하라.”
김일손이 아뢰었다.
"신이 어찌 감히 숨기오리까. 신이 듣자오니 ‘권 귀인(貴人)은 바로 덕종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하옵기로, 신은 이 사실을 썼습니다.”
김일손은 세조가 성종의 아버지인 큰 아들 덕종의 후궁을 취하려고 했다고 사초에 적은 것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리면서, '김종직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보고 느낀 바대로 충분(忠奮, 충성스러운 분노)으로 지었다'는 평가를 근거로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죽음으로 이끈 세조를 비난하고 단종을 애도하는 내용임을 유자광이 조목조목 밝히면서 사태는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았다.
김일손이 함양에서 압송되어 국문을 시작한 지 3일 후인 7월 15일, 유자광이 김일손을 추국 하면서 소매 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놓았는데, 그것은 바로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이날의 실록은 이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유자광이) 소매 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놓았는데, 그것은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그중에서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글(弔義帝文)’과 ‘술을 읊은 시(述酒詩)’를 지적하여, 여러 추관(推官)들에게 두루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이 모두 세조를 가리켜 지은 것이고 김일손의 악행도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된 것이다.’ 하며, 제 스스로 주석을 하고 구절마다 풀이하여, 왕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고, 이어 아뢰기를, ‘종직이 우리 세조를 비방하였으니, 그 부도(不道)의 죄는 대역(大逆)으로 논해야 마땅하며, 그의 글은 유전(流傳)할 수 없으니, 다 함께 불태워 버리기 바랍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김종직의 문집은 유자광의 말대로 모두 회수하여서 불살랐다.
연산 4년 7월 17일, 연산군은 예조에 명을 내렸다.
"조정 내외의 사람 중 혹 김종직의 문집을 수장한 일이 있으면 즉시 바치게 하고, 이행하지 않는 자는 중히 논죄하도록 하라.”
7월 22일, 예조가 조정의 관원들이 소장하고 있는 김종직의 문집을 모조리 압수하여 아뢰니, 연산군이 명했다.
"궁에서 불사르되 잡혀온 죄수를 모아다가 보여, 문집을 차마 세상에 남겨둘 수 없는 뜻을 알게 하라.”
다음날도 추가로 압수한 문집을 불살랐고, 10월 7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민가에 소장된 김종직의 문집을 모아다가 승정원에서 불태웠다.
또한 각 도의 관사와 궁궐에 있는 김종직이 쓴 현판을 모두 철거하여 불태우게 했다. 실록은 이것을 ‘유자광이 과거 함양에서 있었던 원한을 보복한 것이었다.’고 했다. (중종실록, 중종 2년 4월 23일)
함양에서의 원한은 유자광이 함양 학사루에 올라 시를 적은 것을 현판으로 걸었는데,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이를 철거하여 불사른 사건을 말한다.
조의제문으로 김종직과 제자들은 엄청난 화(禍)를 입었다.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시해한 일을 빌어, 선왕(先王, 세조)을 헐뜯은 대역(大逆)의 죄를 물어 김종직은 무덤이 파헤쳐지고 부관참시를 당했다. 김일손은 물론, 함께 성종 때의 사관이면서 김종직의 제자였던 권오복과 권경유도 조의제문을 칭찬하며 사초에 올렸다는 죄를 물어 능지처사(凌遲處死)를 하였다.
능지처사는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던 극형으로, 죄인을 죽인 뒤 시신의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 쳐서 전국 각지에 돌려 보이는 형벌이었다.
그리고 대역 무도한 김종직의 제자들이라는 이유로 참형에 처해지거나, 변방 지역의 관노가 되었다. 김굉필, 정여창, 조위 등 수십 명의 제자들은 곤장을 맞고 도성과 가장 먼 변경 지역으로 귀양을 가거나 노역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무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무오사화라고 부른다. 무오년에 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고 하여 사화(士禍)라고도 하고, 사초(史草)로 발단되었기에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김종직의 제자들의 고난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6년 뒤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무오년에 내린 죄를 다시 물어, 김굉필, 강백진 등 김종직의 제자들은 참형을 당하고 귀양을 살다가 죽은 조위, 정여창, 표연말 등은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실록에 의하면 무오사화로 인해 사관들의 기록이 크게 위축되었다.
“무오사화가 일어난 뒤로 사관의 기록하는 것이 왕의 말을 받아 쓸 뿐이었는데, 반정 뒤로는 사람들이 불붙은 기름 속에서 살아나자 놀고 즐기는 데만 빠져 직무를 돌보지 않고 왕의 말마저도 기록하지 않다가, 여러 해를 지나고 나서야 사고(史稿)를 정리하니, 조정의 논의나 상벌 등의 일에 빠진 것이 많았다.” (중종실록, 중종 2년 6월 2일)
더욱 심각한 것은 무오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참화를 당하자, 학문하는 풍토가 크게 상했다.
“‘유림(儒林)들은 기가 죽어서 들어앉아 탄식만 하고 있고, 학사(學舍)는 쓸쓸하여 몇 달 동안 글을 읽고 외우는 소리가 없었다. 부형들은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공부는 과거(科擧)에 응할 만하면 그만두어야 한다. 많이 해서 무엇하느냐고 했다.” (연산군일기, 연산 4년 7월 29일)
글이 문제를 일으켜 화(禍)를 입는 일을 필화사건이고 한다면, 김종직의 조의제문처럼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글이 있을까. 조선에 이보다 더 큰 필화사건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다시 읽고 새길만한 실록의 기록이다.
“순(舜) 임금의 아비 고수와 우(禹) 임금의 아비 곤이 모두 악덕이 있었는데, 사관이 그 악행을 숨김없이 적었으며, 공자께서 《춘추》를 지을 때 당대 임금의 조그마한 잘못도 기록하였습니다. 신이 세조의 일도 꺼리거나 두려워하여 피하지 않고 당시의 지나친 처사를 모두 썼습니다.” (연산군일기, 연산 4년 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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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