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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Sep 28. 2022

중국 가는 사신단에 청탁하다 파직당한 재상 (3)

대제학에 대한 신망과 존경은 선비들로부터 멀리 떠나버렸다

 대제학에 대한 신망과 존경은 선비들로부터 멀리 떠나버렸다


 사간원의 간원들이 연명하여 서거정의 빠른 복직에 이의를 제기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으나 임금은 사간원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종실록, 재위 8년 7월 19일, 20일)

 사간원의 정 5품 헌납이 경연에서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였다. 

 "《대전(大典)》에 공신이 파직을 당하면 1년을 경과해야만 서용한다고 정해져 있는데, 어찌 서거정의 복직을 빠르게 한 것입니까.  대저 법이란 백성과 같이 하는 것이거늘, 어찌 대신에 대해서만 법을 굽혀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정 5품 사헌부 지평도 사간원 간원의 말을 거들었다. 

 "법을 정한 것과 적용함에 다름이 있으니, 이렇게 되면 법이 백성에게 불신(不信)을 받게 됩니다."

 임금이 좌우의 정승에게 대간들의 의견에 대해 물었다. 영사(領事) 한명회가 아뢰었다. 

 "대간들의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법에는 팔의(八議)의 규정으로 의현(議賢)과 의능(議能)의 법이 있습니다. 또 중국과 외교를 위해 서거정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팔의(八議)는 죄를 범했을 때 해당 형법으로 처리하지 않고 조정의 중신들과 의논하여 죄를 경감해주는 규정이 적용되는 8가지 유형의 규정을 말했다. 그중 의현(議賢)은 덕행이 있는 자의 죄를 의논하는 것이고, 의능(議能)은 능력이 있는 자의 죄를 의논하여 형벌을 경감 적용하는 것을 말했다. 한명회는 서거정이 훌륭한 문장으로 중국 사신들을 능숙하게 대응하였으므로 향후 중국과 외교에 필요한 인물이라고 변호한 것이었다. 


 사간원 헌납이 다시 나섰다.

 "공신인 까닭으로 1년을 경과하여 서용하는 것이 바로 의현·의능·의공(議功) 하는 뜻입니다."

 의공(議功)도 팔의(八議)의 하나로, 공(功)이 있는 자의 죄는 일단 조정의 중신들과 의논을 거쳐 죄를 적용함을 말했다.


 사헌부 지평도 나섰다.  

 "신들도 어찌 끝내 서용하지 못한다고 말하였겠습니까? 법에 정한 기한을 채우고 서용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한명회가 다시 아뢰었다. 

 "국경에 뜻하지 않은 변이 일어났다면 용맹한 장수가 파직되었다고, 법에 구애되어 쓰지 않음이 옳겠습니까?"


 임금이 말했다. 

 "대간들의 말은 옳다. 국경에 변이 난 것처럼 부득이하여 서거정을 서용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과인의 과실이다. 하지만 이미 그에게 벼슬을 주었는데, 다시 빼앗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헌부 지평이 아뢰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 물건을 즐겨 써서 무역을 위해 운반할 때, 백성이 폐해를 입고 머나먼 길에 말들이 지칩니다. 청컨대 비단은 일절 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절 금지하면 이러한 폐단도 없어질 것입니다."


 한명회가 나서서 말했다. 

 "세조 때는 재상으로 하여금 베 5 필을 보내어 중국 물건을 무역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베를 중국에 보내는 자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법으로 금한 것이 엄격하여, 비록 재상이라 하더라도 평상시의 옷에 색깔 있는 비단을 입지 못하고, 혼인을 할 때도 사람들이 드물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법으로 금하고 있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을 뿐이다. 새로 법으로 금지할 필요는 없다." (성종실록, 재위 8년 7월 21일)


 새로 임명된 정 6품 사간원의 정언 김맹성이 서거정의 빠른 복직의 부당함을 임금에게 아뢰는 등 대간들의 탄핵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서거정은 드디어 사직 상소를 올렸다. (성종실록, 재위 8년 7월 23)

 서거정의 사직 상소를 임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종은 한 번 내린 벼슬을 다시 거두기 어렵다 하며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조정의 관리나 전국의 선비들로부터 대제학 서거정에 대한 신망과 존경은 멀리 떠나 버렸다. 


 사관도 서거정에 대한 세상의 인심을 반영하여 그의 성품에 대한 기록을 실록에 남겼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은 이로써 그를 작게 여겼다." (성종실록, 재위 19년 12월 24일, 서거정의 졸기)


 그러면 조정은 서거정 등의 범죄 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감히 누가 재상의 잘못을 들추어내었을까? 그리고 권세가들은 어떤 물건을 사신단에 맡겨 중국의 물품을 사 오게 하였을까. 당시의 실록을 살펴보자. 


 실록의 기록을 보면, 중국 사절단의 검찰관 권경우가 조숭손의 비리를 적발하여 국경을 넘으면서 조정에 바로 보고하였고, 임금은 권경우를 칭송하며 포상을 내렸다는 내용이 보인다. 

 “천추사 검찰관 권경우가 통사 조숭손이 함부로 마포(麻布, 삼베) 2백62 필, 수달피 15장, 호피(狐皮, 여우가죽) 47장, 초피(貂皮, 족제비 가죽) 5장을 싸 가지고 가는 것을 적발하여 아뢰었다.”


 임금이 보고를 받고 강개한 검찰관 권경우를 포상하라고 명했다.

 "근래에 북경에 가는 검찰관이 하나도 들추어내는 사람이 없었는데, 권경우가 홀로 이를 해내었으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큰 상을 주어 그 곧은 것을 정표(旌表, 바른 행실을 칭송하고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림)하고자 한다." (성종실록, 재위 8년 4월 12일)


 권경우는 중국 사신단과 함께 귀국하니, 자신이 다섯 품계를 올려서 포상을 받은 사실을 알고, 임금에게 이를 사양하였다. 

 "신이 통사 조숭손의 불법한 일을 적발한 것으로 인해, 성상께서 특별히 신에게 다섯 품계를 올렸습니다. 신이 한 바는 검찰관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무슨 공(功)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것을 사양하겠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비록 맡은 바 일을 한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그대가 능히 하였다. 과인이 그대에게 보다 중요한 직책에 옮기려고 했는데, 대간의 말로 인해 품계만 올려주었을 뿐이다." (성종실록, 재위 8년 8월 25일) 


 권경우는 성품이 강직해 권세가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직무를 공정히 다스려 조정의 관리들은 물론 국왕마저 감복했다. 사관도 그를 가리켜 ‘뜻을 세운 것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성종실록, 재위 8년 4월 12일)


 권경우는 이후 사간원 정언과 사간, 도승지와 대사헌으로 활약하다가, 연산군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으로 인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강릉부의 관노로 내쳐졌다. 동생인 권경유가 김종직의 제자로 주범으로 몰려 처형되자, 죄가 연좌되어 당한 일이었다. 이후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복권되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다시 읽고 새길만한 실록의 기록이다.

 "지위가 의정부의 재상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명분과 절의를 닦아서 청렴하고 조심하여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인데, 지금 나라 법을 범하였으니 이미 대신의 체모를 잃은 것입니다. 전하께서 친히 불러서 물으실 때, 진실을 말하지 않고서 서팽형에게 미루었으니, 어찌 신하 된 도리이겠습니까?" (성종실록, 재위 8년 4월 21일)

 "법은 백성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법이 한 번 정해지면 군주라도 사사로이 집행할 수 없습니다." (성종실록, 재위 8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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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신단 그림, 사진 출처)

https://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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