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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Oct 06. 2023

조선에 여자사관(女史)이 있었다면?

 여사(女史) 제도


 여자사관인 여사(女史)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있었다. <신입 사관 구해령>이다. 조선 시대 양반가의 딸인 구해령이 사관을 뽑는 시험에 당당히 합격해 예문관의 여자사관이 된다는 독특한 소재로 드라마는 인기를 끌었다.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은 사관들에 의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다. 하지만 임금이 편전에서 업무를 마치고 물러나 궁궐 깊은 곳으로 간다면 남자 사관은 따라가지 못하고 덩달아 기록도 멈추게 된다. 정치는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이루어진다. 정치는 왕과 신하들의 논의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왕과 왕비나 대비, 혹은 후궁과의 상호작용도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중국은 주나라 이후 송나라 등의 왕조에서 밤에 왕이 머무는 내전(內殿)에서의 행동이나 대화를 기록하기 위해 여자사관 제도를 두었다. 

 여자사관 제도를 도입하면 궁궐 깊숙한 곳에서 왕이 왕비나 대비, 심지어 후궁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내관 등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도 역사에 남을 것이다. 왕의 사생활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 왕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으나, 보다 투명한 정치는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도 여자사관 제도가 도입될 뻔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지 120여 년이 지난 중종 시절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중종은 연산군을 폐위하고 즉위한 왕이었다. 조광조 등을 중심으로 한 사림(士林)들은 임금을 모범적인 군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경연을 통해 왕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왕도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과감하게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다. 

 1520년 중종 14년 4월, 아침 경연인 조강이 열렸다. 임금이 경연관들에게 역사 강의를 듣는 자리에서 신하들은 새로운 제도 도입을 주장하였다. 신하들은 《속강목(續綱目)》에 담긴 중국 송나라 역사를 강의하면서 조선도 여자사관을 두어 내전에서 왕의 언행을 모두 기록해야 한다고 제안을 올렸다.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이날 경연에서 정 2품 의정부 우참찬 김안국이 아뢰었다. 

 "여기에 북송의 황제 신종과 태후(황제의 어머니)가 말한 일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규문(閨門,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곳) 안의 말이라 사관으로서는 기록할 수 없는 일이니, 반드시 여자사관이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김안국은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여자사관은 규문 안에서 임금의 거동과 언행을 모두 다 기록하므로 외인(外人)이 그 일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역사책에 기록하여 놓음으로써 뒷사람이 그것을 보고 선악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깊은 궁궐 안의 일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은 여자사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사(女史)가 없는데, 규문 안 내전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어떻게 자세히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옛 관례에 따라 여자사관을 두어 그로 하여금 임금의 동정(動靜)과 말한 바를 기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의 문인으로 학문 수준이 높고 도학에 통달하여 사림파를 이끌며 제도 개혁을 선도했다. 조광조의 제자이기도 한 정 4품 사헌부 장령 기준(奇遵)이 김안국의 제안을 거들었다. 

 "합당한 말입니다. 임금은 깊은 궁궐 속에 거처하므로 그 하는 일을 바깥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사관을 두어 선악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비록 깊숙한 궁궐 속의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에서도 감히 방만하지 못했던 것이니, 모름지기 옛 제도에 따라 여자사관을 두는 것이 옳습니다.”

 김안국과 기준이 말한 옛 제도는 중국 주나라 왕실의 관직제도인 <주례(周禮)>에 기록된 여사(女史)라는 관직을 말했다. <주례>는 왕후의 명령 등을 기록하기 위해 여자사관을 둔다고 하였다. 중종은 당황해하며 신하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모두 글을 지을 줄 알았으므로 올바른 여자사관을 얻어서 대궐 안의 일을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하도록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글에 능한 여자가 아마도 적은 것 같으니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을 얻기가 어려울 것 같다.”

 김안국은 임금의 말에 반박하며 아뢰었다. 

 "여자사관은 반드시 글에 능해야만 될 수 있는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문자를 조금 해득할 수 있다면 깊은 궁궐 속의 일을 보는 대로 기록하여, 후세의 왕과 현인들로 하여금 선왕(先王)은 깊은 궁궐 안 혼자 있는 곳에서도 잘못하는 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권징(勸懲,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하는 바가 클 것입니다.”

 임금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김안국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을 더했다.

 “밖에서는 좌우에 시종(侍從,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 승지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원 등을 일컬음)과 사관이 있으면서도 안에는 여자사관이 없으니,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큰 흠결입니다. 깊은 궁궐 안 내전에서의 일에 대하여 후세의 자손들이 어떠하였는지를 모르게 하는 것은 매우 불가합니다.”

 중종은 김안국의 논리적인 반박에 마땅히 대답할 말을 잃었다. 이때 경연에서 왕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일을 맡은 정 4품 시강관(侍講官) 이청이 나서서 임금의 우려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아뢰었다. 

 "이른바 언문(諺文, 한글)으로 기록해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어찌 한문으로만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재위 14년 4월 22일)



 깊은 궁궐의 일도 역사입니다


 중종은 여자사관 도입에 대한 신하들의 제안을 반대했다. 중종은 지금의 결정이 자신은 물론, 앞으로의 왕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임을 자각했다. 임금은 여사(女史)의 자격 문제를 거론하며 에둘러 말했다.

 "여자사관의 직임은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기록하는 것이니, 반드시 마음이 올바른 여자를 얻은 뒤에라야 가하다. 사관은 모름지기 정직한 사람을 가려야 하지 않은가. 사필(史筆)을 잡는 일은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강관 이청이 물러서지 않고 아뢰었다.

 "여자사관의 직무는 예문관 사관과 차이가 있습니다. 사관은 조정 신하들의 의논한 바를 기록하고, 무엇이 옳고 그르며 착하고 악한지를 판단하여 만세(萬世)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 직무이고, 여사는 규중 안에서의 임금의 일상생활을 기록하는 것뿐입니다."

 중종은 신하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자, 다른 문제로 화제를 돌리며 피해나갔다. 중종은 뜬금없이 대신들을 나무랐다.  

 "어진 이를 천거하는 것이 대신의 직임인데, 근일 대신들이 어진이를 천거하는 도리에 있어 미진한 것 같다......" (중종실록, 재위 14년 4월 22일)

 임금이 말머리를 돌려 궁한 입장을 피해나가자, 신하들은 여자사관 제도 도입에 대해 더 이상 말하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전 공조좌랑 심의(沈義)가 관제와 관복의 개혁 등 7가지 제도 개혁을 주장하면서 여자사관제도를 둘 것을 진언하는 등 새로운 제도를 신설하자는 주장은 계속되었으나 중종은 긍정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 (중종실록, 재위 14년 8월 15일)


 3개월 뒤, 중종 14년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중종은 한 밤중에 조광조 일파를 모두 잡아들였다. 천하의 인심이 대사헌 조광조를 지지하니 조광조는 공신들을 제거한 후스스로 임금이 될 꿈을 꾸고 있다는 공신 세력들의 모함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개혁의 주창자인 조광조가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게 되고, 기준은 죽고 개혁의 동조자 김안국과 이청은 파직되었다. 연산군 시절에 벌어진 무오, 갑자년에 이어 선비들이 화를 당한 세 번째 사건으로 역사에서는 이를 기묘사화로 부른다.

 기묘사화로 사림이 몰락하고 공신 세력이 득세하면서 제도개혁과 변화는 모두 멈추고  되돌려졌다. 당연히 왕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여자사관제도를 도입하자는 신하들의 제안도 사라져 버렸다.


 조선이 여자사관 제도를 도입하였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렇게 되었다면 낮에 편전에서 왕과 신하가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장면에 더하여 밤에 대비전에서, 혹은 왕비의 궁에서 나눈 기록들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500년 역사에 왕은 27명이었지만 왕비는 45명이었다. 기록을 통해 조선의 국왕과 함께 왕비나 시대별로 중요한 역할을 한 후궁들의 성품과 언행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어떻게 왕을 보좌하고 조언했는지도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신독(愼獨)이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간다는 말이다. 조선의 왕과 신하가 함께 꿈꾸던 왕도정치의 완성은 왕의 수신(修身)으로 시작된다는 믿음이었으니 왕의 사생활은 보호되지 않았겠으나 정치는 보다 맑아졌을 것이다. 오늘날 다시 읽고 새길만한 실록의 기록이다.

 "여자사관이 궁궐 깊숙한 곳의 일을 보는 대로 기록하여, 후세의 왕과 현인들로 하여금 선왕(先王)은 깊은 궁궐 안 혼자 있는 곳에서도 잘못하는 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바가 클 것입니다.” (중종실록, 재위 14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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