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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Oct 06. 2023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의 항명

 바람 앞의 등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을 타일러 왜적을 대응하는 군사를 모으는 임무를 맡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은 진주가 전략적 군사 거점임을 강조했다. 당나라 시절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장순(張巡) 등이 수양성을 사수하여 반란군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었던 일과 같은 요충지라고 했다.

 “신이 보건대 진주는 남쪽 지방의 주요 군사 거점으로 영남과 호남의 요충지에 위치하였으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일대에 보존된 여러 고을이 흙더미가 무너지듯이 와해되고, 적이 반드시 호남을 침범할 것입니다. 이곳은 바로 수양(睢陽) 1군(郡)이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된 것과 같으니, 오늘날 꼭 지켜야 할 곳입니다.” (선조실록, 재위 25년 6월 28일)

 임진년 1592년 가을, 일본군은 이순신 장군에게 남해 해전에서 거듭 패배를 당하여 서해로 나아가는 바닷길이 막혀 해로를 이용한 보급에 문제가 생겼다. 일본군은 이순신의 함대가 버티고 있는 바닷길을 포기하고 싸움에 필요한 군량 등 전쟁 물자를 조선 현지에서 동원하고자 하였다. 일본군의 진주성 격파는 호남침공의 길을 열어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이순신 함대의 뒷마당을 위협해 조선수군을 견제하며, 경상우도에 창궐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를 장악해 의병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겠다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 계책이었다.

 비변사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진주 판관 김시민의 전공은 장계에 의하면 매우 뛰어납니다. 급히 벼슬을 올려 격려함으로써 권장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선조실록, 재위 25년 7월 26일)

 선조는 비변사의 요청대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운 판관 김시민을 진주 목사에 제수하였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왜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염초 150여 근을 비축하고 총통 170여 정을 만들며 수성군을 훈련시키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요충지인 진주성 공격을 명령했다. 풍신수길의 명을 받은 일본군은 조선 정벌군 총사령관인 우키타 히데이에로를 총대장으로 하여 부산과 김해에 집결한 병력 3만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향했다.

 “부산 등지에 주둔했던 적이 군사를 합쳐 대대적으로 진주(晋州)를 포위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10월 1일)

 진주성으로 향하던 3만의 대병력은 진주로 가는 길목인 함안 등지에서 조선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조선군은 팔천여 전사자를 내며 일본군에 거듭 패하였다. 경상우도 최고의 군 지휘관인 병마절도사 유숭인은 본영인 창원에 주둔하고 있었다. 유숭인은 임진년 개전 초에 함안군수로서 관군 및 고을 백성을 규합하여 성을 지키고, 곽재우의 의병에게 진로를 차단당한 왜적을 추격하여 적 47급을 베어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전공으로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파직당한 김성일 후임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함안 군수 유숭인은 목을 벤 왜적의 수가 47명이나 되니, 그 공을 칭찬할 만합니다. 벼슬을 올리고 품계를 올려주어 권장함을 보이소서.” (선조실록, 재위 25년 7월 25일)

 “(일본의 침략은 없을 거라고 임금을 속인) 경상 우병사 김성일을 잡아다 국문하도록 명하였다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석방시켜 도로 본도의 초유사로 삼고, 함안 군수 유숭인을 대신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4월 14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유숭인은 진주성의 길목인 창원의 노현 고개에서 2천여 명의 병력으로 매복하여 왜군을 저지하려고 했다. 유숭인은 3만여 명의 왜적과 맞닥뜨려 중과부적으로 패퇴하고, 창원성으로 퇴각하였다.

 “부산·김해 등지에 주둔한 여러 곳의 적이 연합하여 창원을 공격하니, 병사 유숭인이 두 번 싸웠으나 패하여 도망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9월 1)

 “(진주로 진격하던) 적은 유숭인(柳崇仁)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여러 고을을 분탕질한 뒤 진주로 향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10월 1일)

 유숭인은 소수의 병력으로 분투했으나 창원성마저 함락당하자, 남은 병력을 이끌고 김시민이 지키고 있는 진주성으로 급히 후퇴하였다. 이와 동시에 3만의 일본군도 진주성으로 향했다. 진주성은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風前燈火),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진주성을 지킨 항명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소속 천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진주성에 도착한 유숭인은 성문을 열어달라고 했으나 수성장 김시민은 거절하였다. 진주목사는 정 3품이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는 종 2품으로 유숭인이 상급자다. 더구나 경상우도 관내에서는 병마절도사가 군의 최고 지휘관이다. 그럼에도 김시민이 유숭인의 명을 거역했으니 명백히 항명인 셈이다. 김시민은 3천여 명의 병사로 10배에 가까운 3만 대군에 맞서고 있어 한 명의 병사가 아쉬울법한데 왜 유숭인의 병사를 성안으로 들이지 않았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적이 진주에 육박했을 때 유숭인이 말을 달려 성 아래에 이르러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김시민이 장수의 명령 계통이 일관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성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성문을 계엄 중에 열고 닫을 때 창졸간에 변이 있게 될까 염려되니 우병사께서는 밖에서 응원해 주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10월 1일)

 김시민은 병마절도사로 상관인 유숭인이 성 내로 들어오게 되면 지금까지 짜놓은 방어계획이나 지휘 계통 등에 혼선이 생겨 일사불란한 수성전이 되지 못하게 됨을 염려했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유숭인은 김시민의 항명을 수성장의 권한으로 인정하고,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김시민보다 상관인 유숭인은 군의 지휘계통을 거론하여 겁박하며 성문을 열라고 명령해 진주성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숭인은 김시민의 말을 따라 자신의 군대를 성 밖에 주둔하여 성안의 군사들과 협력하여 진주성을 지키기로 결단하였다.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진주성 근처에 적당한 지역을 찾아 주둔하려고 길을 나서다 빠르게 진주성으로 진격하는 대병력의 왜군과 마주하고 말았다. 결국 유숭인은 일본군과 만나 교전 중 천여 명의 군사와 함께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하였다.

 “유숭인이 (진주성에서) 돌아오다 적을 만나 패하여 사천 현감 정득열, 권관 주대청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10월 1일)  

 유숭인이 진주성에 들어가면 지휘체계에 문제를 유발할 것은 분명한 일이었고, 그렇게 되면 영남과 호남의 보루인 진주성을 지켜낼 수가 없다고 판단한 김시민은 군법에 회부될 각오를 하고 항명을 하였다. 의병장 곽재우는 김시민의 항명을 칭찬하였다.

 “곽재우가 김시민이 유숭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이 계책이 성을 온전하게 하기에 충분하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10월 1일)


 김시민은 6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된 일본군의 끈질긴 공격을 봉쇄하고, 여러 적장을 죽이고 왜군들에게 수많은 피해를 입히며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진주성 대승은 행주 대첩과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불린다. 김시민의 진주성 방어로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군은 보급에 큰 타격을 입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조차 힘들어졌다. 김시민은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다, 이순신 장군처럼 마지막날 전투에서 왜군의 총탄을 맞아 전사했다. 조선 조정은 김시민의 충정과 공로를 기려 이순신 장군과 동일하게 '충무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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