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류산 Oct 06. 2023

관찰사 목을 베어야 한다고 한 의병장 곽재우

 도망한 수령이나 장수는 참수하라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곧바로 의병을 일으켰다. 남명은 곽재우를 귀하게 여겨 외손녀의 배필로 삼았다. 남명은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라고 하며, 학문을 배워 수양한 바의 실천(義)을 제자에게 가르쳤다. 남명은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왜적이 조선을 침범하여 나라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음을 내다보았다. 제자들에게 병법을 익히도록 하며 왜적을 물리칠 대책을 강구하도록 가르쳤다. 경상도 의병장의 대다수가 남명의 제자였음은 우연이 아니었다.

 의병장 곽재우를 묘사한 실록의 기록이다.

 “곽재우는 왜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가산을 모두 풀어 재질이 있는 무사와 사귀었다. 그리고는 ‘겁탈하는 도적들은 과감하고 사납기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며, 무예를 익힌 자들을 찾아 권유하여 먼저 수십 명을 얻었는데 점점 모인 군사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6월 1일)

 곽재우는 경상도 관찰사를 탄핵하는 상소를 작성하여 인편을 통해 도성을 빠져나와 행재소에 머물고 있는 임금에게 올렸다. 

 "경상 감사 김수(金睟)는 왜구가 침입하자 자신이 먼저 도망침으로써, 경상도의 성을 지키는 장수들로 하여금 한 번도 싸워보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김수의 죄는 머리털을 뽑아 세면서 처벌하더라도 민심을 달래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신이 삼가 격문을 도내에 보내어 그의 죄를 나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잡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주(道主)의 과실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아무런 일이 없는 평상시라면 진실로 도의 감사를 비난하는 것이 부당하겠으나 이처럼 위급한 때에 모두가 각자 침묵만 지킨다면, 이는 한갓 도주가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6월 1일)

 천지가 놀랄 일이었다. 일반 백성이 관(官)을 그것도 도의 우두머리를 처형해야 마땅하다고 탄핵한 일이다. 곽재우는 관찰사뿐만 아니라 적을 맞아 싸 우지 않고 도망간 수령이나 장수들을 보면 바로 처형하라고 격문을 돌렸다.

 “곽재우는 도망한 수령이나 장수들의 소식을 들으면 꼭 참수(斬首)하라고 하였다. 심지어는 경상 감사와 병마절도사에 대해서도 불손한 말을 하니 그를 비방하는 말이 비등하여 미친 도적이라고 했다.” (선조실록, 재위 25년 6월 28일)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켜 창고 문을 열어 곡식을 풀고, 처자의 의복까지 모두 군복을 짓기 위해 내놓았다. 하지만 수많은 장정들을 먹일 곡식도 부족하고 이들을 무장시키기에는 무기도 태부족이었다. 의령 관아의 창고는 수령이 불을 지르고 도망가버려, 군량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곽재우는 인접한 관아의 창고를 뒤져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고 강에 버려진 세곡선의 곡식을 가져다 군량에 보태었다.

 곽재우는 격문을 지어 도내에 전파시켜 경상 감사 김수의 10가지 죄를 지적한 뒤, 도내 여러 장령으로 하여금 김수의 머리를 베어 임금이 계시는 행재소에 보내야 한다고 하였다. 곽재우는 김수에게 경고하는 말로 격문을 마무리했다.

 "네가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쉬고 있으나 실제로는 머리가 없는 시체와 같다. 네가 조금이라도 신자(臣子)의 의리를 안다면 너의 군관으로 하여금 머리를 베게 하여 천하 후세에 사죄해야 마땅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장차 너의 머리를 베어 신인(神人)의 분노를 씻겠다. 너는 그것을 알라."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6월 1일)

 김수는 곽재우의 격문에 크게 노하여 휘하 수령 등을 시켜 곽재우를 잡아들이라고 명하고, 곽재우를 역적이라 부르며 군사를 일으킨 일이 나라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 반역을 도모하는 양상이라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6월 1일)


 조정은 김수와 곽재우가 각각 다른 주장을 하는 장계를 보고 갑론을박했다. 곽재우가 일개 유생의 신분으로 관찰사를 처단하려고 격문을 돌려 성토한 일은, 아무리 국가를 위한 분노로 그랬다 하더라도 질서를 어지럽힌 백성의 행위에 해당되니 즉시 중벌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선조는 대신들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했다. 선조가 물었다.

 “곽재우가 김수를 죽이려고 하는데, 혹 자신의 병세(兵勢)를 믿고 죽이려는 것이 아닌가?”

 도승지 유근이 아뢰었다.

 “재우가 김수의 장수에게 통문(通文)을 보내어 ‘네가 김수를 죽이지 않으며 내가 군사를 일으켜 죽이겠다.’고 하였다 합니다.”

 임금이 물었다.

 “김수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군사를 거느린 곽재우를 꾸짖을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좌의정 윤두수가 아뢰었다.

 “김성일을 시켜 타이르는 것이 옳겠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김수의 형편이 위급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장계에 ‘신의 생사(生死)가 열흘이나 한 달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선조실록, 재위 25년 8월 7일)



 초유사(招諭使)의 중재


 병란(兵亂)이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군사를 모으는 일을 하던 직책인 초유사를 맡은 김성일은 중재에 나섰다.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은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다. 김성일은 김수의 주장과는 달리 곽재우가 충성심에서 가산을 풀어 의병을 일으킨 정상을 낱낱이 밝히고, 이어서 아뢰었다.

 "곽재우가 실제로 역심(逆心)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현재 정병(精兵)을 장악하고 있으니 쉽사리 체포할 수 없고 만약 역심이 없다면 한 장의 편지로도 충분히 타이를 수 있겠기에 신이 직접 편지를 써서 경계시켰습니다. 그러자 재우가 바로 태도를 바꿔 순종하였으며, 진주가 포위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이끌고 벌써 구원하러 달려갔습니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6월 1일)

 조정은 김성일의 장계를 보고 곽재우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 김성일은 김수와 함께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으므로 김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정은 김수를 경상감사에서 물러나게 하여 서로 부딪히지 않게 하였다. (선조실록, 재위 25년 8월 7일)

 사관은 이때의 일을 상세히 기록하며 평하였다.

 “곽재우는 4월 24일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토벌하였으니,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자이다. 왜적들이 정암진을 건너 감히 호남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곽재우의 공이다. 곽재우는 경상감사 김수가 싸우지 않고 퇴각하는 것에 분격하여, 의병을 일으킬 적에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어 김수의 죄를 일일이 따져 책망하고 그를 베려고 하였다. 김수가 매우 두려워하여 장계까지 올려 변명하면서 곽재우의 일을 마치 역적처럼 말하니 비변사의 여러 사람들도 재우를 의심하였다. 그러자 곽재우도 이로 인하여 죄를 얻어 마침내 뜻을 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사람을 의주로 보내 상소하기로 하고 김수의 죄를 따져 책망한 말을 모두 열거하여 상소문을 만들고 ‘그는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여 불충불효하며 패전으로 왜적을 맞아들였다.’고 하였다. 또 금관자(金貫子, 높은 벼슬아치의 망건을 조이는 고리)를 잃어버리고 달아났으니 머리 없는 시체 귀신이라고 김수를 욕했다. 김성일이 힘껏 저지하지 않았다면 김수가 아마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수가 산음현(山陰縣, 지금의 산청)에 피해 있다가 곽재우의 선봉이 바싹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함양으로 도망갈 때에는 심지어 말을 거꾸로 타고 달아나니, 김수가 왜적에게 겁먹고 또 재우에게 겁먹은 것을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조실록, 재위 25년 6월 28일)

 비변사에서 임금에게 전황을 아뢰면서 곽재우를 포상할 것을 건의하였다.

 “곽재우는 의병들이 벤 왜적의 머리를 모두 강 속에 던져버리고 전공을 스스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곽재우는 일찍이 조정에서 관직 한번 받은 바 없건만, 그의 행위를 보면 고인(古人)에게 부끄러운 점이 없으니 후하게 포상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선조가 곽재우의 공을 칭찬하였다.

 “듣건대 정인홍·김면·박성·곽율·조종도·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경상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더구나 곽재우는 비상한 작전으로 적을 더욱 많이 죽였는데도 그 공로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로, 그의 명성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8월 1일)

 비변사는 곽재우가 연이어 왜적을 물리친 소식을 듣고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곽재우가 행한 일을 보면 세속을 벗어난 사람의 행위와 같습니다.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이 진군하는 길을 막고 죽인 적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공을 스스로 말하지 않습니다. 5품의 관직을 제수하소서." (선조실록, 재위 25년 8월 16일)


 김수가 경상도 감사에서 물러나 임금을 뵈었다. 선조가 김수를 보고 말했다.

 "과인이 부덕(不德)하여 경으로 하여금 고달프게 하였다."

 김수가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었다.

 "신은 아뢸 말씀이 없고 오직 죽고 싶을 뿐입니다."

 선조는 곽재우에 대해 물었다.

 "곽재우는 지모(智謀)가 있는가?"

 김수가 아뢰었다.

 "신이 그 사람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사람됨이 보통은 아닙니다. 어려서 무예를 닦고 병법서를 읽었습니다. 문자를 터득해 일찍이 과거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의병을 남보다 제일 먼저 일으켜 4월 20일 사이에 기병(起兵)하였는데 처음 기병할 때 사람들이 의심했었지만 신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을 사로잡으면 목을 베지 않고 심장을 구워 먹습니다. 의령과 합천이 온전한 것은 곽재우의 공입니다."

 김수도 왜적과 상대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곽재우를 더 이상 역적이라고 할 명분이 없었다. 

 곽재우는 과거에 합격했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무효가 되자 스승인 남명처럼 평생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서 지내기로 결심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대패하자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통솔력과 전법으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거듭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1592년 4월 22일은 양력으로 환산하면 6월 1일이다. 곽재우가 궐기한 6월 1일은 '의병의 날'로 지정해 매년 기념하고 있다. 오늘날 다시 읽고 새길만한 실록의 기록이다. 

 "경상 감사 김수(金睟)는 왜구가 침입하자 자신이 먼저 도망침으로써, 경상도의 성을 지키는 장수들로 하여금 한 번도 싸워보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김수의 죄는 머리털을 뽑아 세면서 처벌하더라도 민심을 달래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신이 삼가 격문을 도내에 보내어 그의 죄를 나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잡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주(道主)의 과실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아무런 일이 없는 평상시라면 진실로 도의 감사를 비난하는 것이 부당하겠으나 이처럼 위급한 때에 모두가 각자 침묵만 지킨다면, 이는 한갓 도주가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선조수정실록, 재위 25년 6월 1일)

 "곽재우가 행한 일을 보면 세속을 벗어난 사람의 행위와 같습니다.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이 진군하는 길을 막고 죽인 적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공을 스스로 말하지 않습니다." (선조실록, 재위 25년 8월 16일)

이전 06화 조선에 여자사관(女史)이 있었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