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들이
바람에 일렁인다
잎새는
서로의 옷깃을 비비며 속삭인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길 저편,
숲 그림자를 헤치며
한 사내가 다가온다
검은 외투, 풍성한 머리칼
뒷짐을 지고 걸어오는 그는
베토벤이었다
나에게 다가와 무심히 말했다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
음악으로 느껴지지 않소?”
그의 말에 주위를 돌아보니
시냇물은 오선지 위로 달리고
하늘엔 새들이 음표를 물고 날아오른다
“귀를 기울여 보시오
나이팅게일은 플루트,
메추라기는 오보에,
뻐꾸기는 클라리넷 소리로
울고 있지 않소?”
나는 흐르는 물보다
그의 말에 더 젖었다
숲길을 지나 풀밭에 접어들자
소박한 웃음이 들려왔다
그는 뒷짐을 진 채로 말했다
“들리시오?
오보에가 농을 던지면
호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그 사이 바순이
술잔을 채우고 있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진다
나뭇가지가 휘어지고,
풀들이 거칠게 쓰러진다
“번쩍이는 번개와
우르릉 천둥소리는
피콜로와 팀파니,
소용돌이치는 바람과
쏟아지는 폭우는
현악기의 격한 음으로
들리지 않소?”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하늘이 온갖 악기를 연주하여
소리를 내는 줄 알게 했다
따스한 햇살이 비치고
비 머금은 잎들이 반짝인다
멀리서 목동의 피리가 울린다
“들리시오?
폭풍이 지나간 뒤
목동의 노래와 감사 소리가...”
풀 그림자들이
취한 사람처럼 흔들리며
춤을 빚었다
잠시 그 황홀한 춤사위에
말을 잊었다
아내가 어깨를 흔들었다
“음악 들으며 잠이 들었나 봐요
소파에서 자지 말고, 들어가서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