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의 숭산(嵩山), 세월을 뚫고
천년고찰 소림의 문을 지난다
강희제의 붓끝이 남긴 현판 위로
바람은 글씨를 스치듯 흐르고
누각의 단청마다 달마의 숨결을 느낀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工夫出少林),
모든 무술은 이곳에서 싹트고
은행나무 고목에 뚫린 구멍들은
무승(武僧)의 손가락이 새긴 수련의 자취다
장경각(藏經閣) 앞에서
오랫동안 잊혔던 기억이 되살아나
어린 시절 처음 접한 무협지인
군협지(群俠誌)로 들어선다
달빛을 등에 지고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을 품으려
어둠 속 장경각 기왓장 위로 스며든
서원평의 발끝, 숨소리,
숨죽이던 긴장이 가슴을 흔든다
무협지를 읽던 어린 날들이
이곳에서 살아 숨 쉰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 했지만
아마 무협지로 수레 두어 대는 채웠을 테지
약향기 가득한 산문 안
소림 영약(靈藥)이 있을까 기웃거리며
금강불괴신공을 이룬 고승을 찾아
도량을 눈으로 훑는다
소림 문을 나서려는 순간,
뒷목이 저릿하다
돌아보니, 한 노승이 웃고 있다
설마, 이것이 멀리 떨어진 상대의
혈도를 찌른다는 탄지신공(彈指神功)?
문득, 무림의 성지(聖地)에
발 디뎠다는 벅참을 안고
천천히 산을 내려온다
*서원평은 중국무협소설가 와룡생이 쓴 군협지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년협객이다. 서원평은 달마역근경을 수중에 넣기 위해 야음을 틈타 천하 무림의 비기를 소장한 소림사 장경각에 잠입한다.
** 금강불괴신공(金剛不壞神功): 소림사 무공으로 금강석처럼 몸을 단련하여 도검을 맨몸으로 막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무공수련의 완전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