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전
남한강과 섬강의 물길이 만나는 곳
안개처럼 고요한 법천사(法泉寺)
한 소년, 머리카락을 거두고
법문의 샘에 발을 담갔다
세월은 그를 품어
왕의 스승으로, 나라의 스승으로 세워
세상을 자비로 물들였다
84세 노스님은 물가의 절로 돌아와
한 송이 연꽃처럼 스러졌다
왕은 그의 삶과 정신을
하늘에 잇고, 세상에 남기기 위해
찬란한 돌꽃을 새겨 탑을 세웠다
오백 해가 지나 왜란이 일어나고
칼과 불꽃이 절을 삼켰고
탑만이 검은 연기 속에
묵언으로 절터를 지켰다
사백 년이 더 흐른 일제 강점기
폐허가 된 절에 홀로 남은 탑은
일본 왕가의 영물인 삼족오가 새겨지고
페르시아 커튼의 화려한 조각으로
독특한 문양이 일본인 눈에 띄어
어둠 속 배에 실려
낯선 섬나라로 끌려갔다
스님의 법력이었을까
탑은 돌아와 고국의 하늘을 맞았지만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백 년을 경복궁 뜰에서
애타는 세월을 견뎌야 했다
육이오 포탄에
일만 이천 조각으로 흩어진 탑
사람의 기억과 정성
간절한 마음의 손끝이
파편들을 하나씩 맞추며
탑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천 년의 세월을 품은 채
탑은 본래 있던 자리에 돌아와
법천사 옛터에 섰다
그 앞에 서서
놀란 숨을 멈추니
탑은 억겁을 지켜본 돌의 숨결로
포근히 감싼다
*지광국사 탑은 고려 문종 때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오사카에 밀반출되었으나, 반환되어 경복궁에 100년 정도 있었다. 최근 원주 법천사지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