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기회를 얻다 (1)

정몽주 선생의 생가를 찾으니 세조 아래 벼슬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by 두류산

2부 난세에 기회를 얻다


18장


김종직은 집세를 기한 내에 못 내게 되자 쫓겨나 작은 집으로 옮겨 다녔다. 자주 집을 옮겨 다녀야 하는 셋집 생활의 궁핍한 신세를 시로서 풀어놓았다.


‘성중에 있는 몇몇 집들은

다 내가 머물러 살았던 집인데

때로는 내쫓김을 당하여

동서로 자주 떠돌아다녔네.'


한양에서 더 이상 경제적인 궁핍을 버틸 수 없었고, 복직을 시켜줄 기미도 보이지 않아 결국 밀양으로 낙향하였다.


어머니를 실망시키면서까지 낙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정 6품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임명되었다. 임금에게 파직을 당한 지 1년 만이었다.

병마절도사는 방위태세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즉각 병력을 동원하여 대응하는 임무를 맡았다. 경상도 병마절도사는 울산에 지휘부가 있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와 창원의 합포에 지휘부가 있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있었다.


김종직은 복직의 명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하니 마음이 복잡하였다.

‘낙향을 한 계기로 벼슬을 멀리하고 초야에서 밭을 갈며 제자를 가르치려고 마음을 굳혔는데......’

김종직은 사직 상소를 쓰기 위해 붓을 들었다.

종이를 반듯하게 펴놓고, 붓을 먹에 찍어 막상 쓰려고 하니, 사직하려는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김종직은 펼쳐진 하얀 종이를 지켜보다가 마음을 접었다.

"애초에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으면 모를까, 절간의 중도 아닌데 나라의 명을 받고 어디로 숨겠는가.”

김종직은 외직에 임명된 것이니 조정에서 벼슬살이할 때와 비교하면 마음은 편하리라 생각하였다.

"고향에서 벼슬을 하니 어머니도 좋아하시고, 병마평사를 마치면 조그만 고을 수령으로 나가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직은 병마절도사의 명을 받아 군량미를 뱃길로 실어 나르는 현장을 점검하고자 남한강변의 충주 가흥창(可興倉)에 들렸다. 가흥창은 충주에 있는 관곡 창고로 충청도 지역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에서 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을 모아 한성의 관곡 창고로 보내는 곳이었다.

김종직은 주막에서 술과 여자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아전들 일행과 마주쳤다. 사헌부 감찰 경험을 살려 탐문해 보았더니, 아전들이 세금을 거두면서 나라에서 1할만 받으라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2할이나 3할씩 거두어 착복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사헌부 감찰도 아니고, 경상도 땅도 아니니 아전들의 횡포에 속만 끓었다.

‘아전들이 주막에서 향기로운 술을 마련해 놓고 돈을 거두어 계집을 불러대다니..... 백성들은 살을 깎는 아픔인데, 근량을 속여 이득을 챙기고 과한 세금을 거두는 이들은 부끄럽지도 않은가.'


김종직은 또한 뱃길을 통해 지방의 수령들이 조정 대신들에게 지방 특산물을 바리바리 꾸려서 보내고 있음을 목격하였다. 김종직은 등에 짐을 짊어지고 배로 실어 나르는 짐꾼에게 특산물의 행선지를 물었다.

"병조판서 김국광 대감댁에 가는 물품이요.”

목청 좋은 짐꾼의 소리에 김종직은 배에 기름이 가득한 조정 대신들을 떠올렸다.

‘한양의 고관들은 사치와 풍요를 탐내어, 남쪽 사람의 고혈인 줄 알면서도 달게 받는구나.’

지방의 수령들이 대신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혔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김종직은 백성들의 힘든 생활을 접하면서 조정의 정치에 더욱 비판적이 되었다. 고을 양민들은 기아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데 이들을 돌봐야 하는 수령들과 아전들은 제 배를 채우기에 바빴다.

어느 고을 수령인지 강에 배를 띄워놓고 놀이에 빠져있었다. 김종직은 한심하여 중얼거렸다.

"백성의 소쿠리는 이미 텅 비고 도토리조차 구하기 어려운데, 강가에서는 노래 부르며 살찐 소를 잡는구나.”

김종직은 사헌부 감찰이 이곳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러 나왔는지 알아보았다. 조정에서 부패한 수령을 찾아 처벌하라고 어사들을 보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고을의 사정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고 했다.

김종직은 이 말을 듣고 탄식했다.

"유성(流星)처럼 오고 가는 어사들은 길가에 죽은 해골이 어떻게 된 일인지 묻지도 않고 지나치다니.”

김종직은 병마평사로 경상좌도의 각 지역을 들를 기회가 많았다. 김종직은 각 고을의 실정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대동사회를 이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를 꿈꾸었다. 이러한 지방에서의 경험은 훗날 고을의 수령이 되었을 때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김종직은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경주는 도처에 불교 사찰이 있어, 불교를 이단으로 생각하는 김종직의 눈길을 끌지 못하였다. 김종직은 길가에 우연히 사당을 발견하여 물었다.

"절이 즐비한 고장에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라니, 어느 분의 사당이냐?”

김종직은 신라시대 강수(强首)의 사당이라는 말을 듣고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렸다. 강수는 역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유학자 관료였다. 김종직은 자신이 승문원에서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지었듯이, 신라시절의 강수는 당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지었기에 일체감을 느꼈다.

강수는 뛰어난 문장으로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글을 지었고, 당시 당나라에 갇혀 있던 태종 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을 석방해 줄 것을 청한 외교문서는 당나라 고종을 감동시켜 곧 김인문을 풀어주게 한 명문이었다. 강수는 삼국통일 후 설총과 함께 태학을 세워 유교 경전을 풀이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김종직은 강수의 삶이 제자를 기르고자 하는 자신의 포부와 겹쳐진다고 생각했다.

‘강수처럼 성균관의 장관이 되어 조선의 인재들을 양성하고, 대제학이 되어 조선 선비들에게 도학을 널리 알릴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다.’


김종직은 절의의 상징인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의 출생지가 모두 경상도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회가 닿는 대로 찾았다.

이색과 정몽주, 길재 세 사람은 절의를 지킨 고려 말의 학자이자 충신으로, 고려삼은(高麗三隱)이라 일컬었다. 김종직은 이 세 분에게서 학문을 이어받았으니 그들의 유적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색 선생은 정몽주 선생의 스승이고, 정몽주 선생은 길재 선생의 스승이며, 길재 선생은 아버지의 스승이 아닌가.”


울산의 병영에서 가까운 영일(迎日)의 어득호 현감이 객관을 새로 짓고, 당호(堂號)를 지어달라고 요청해 영일을 찾았다. 영일은 김종직이 존경하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고향이었다. 김종직은 객관에 머물면서 인시(寅時, 새벽 4시경)무렵에 동녘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당호를 인빈당(寅賓堂)으로 지어주었다. 인시(寅時)에 해가 손님으로 오는 곳이란 뜻이었다.


김종직은 정몽주의 생가 터를 돌아보며 자신이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벅찼다.

‘고죽국(孤竹國)의 백이숙제가 이 땅에 다시 환생했구나. 천고에 길이 빛날 충절의 혼을 만나 뵈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고죽국은 백이와 숙제가 은(殷) 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에 숨어 살면서 고사리를 꺾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는 전설로 유명한 나라였다.

김종직은 절의의 상징인 정몽주 선생의 생가를 찾으니 불의하게 왕위에 오른 왕의 신하로 벼슬을 하는 자신의 처지가 떳떳하지 못하게 느껴져 울적했다.


김종직은 아버지와 길재 선생의 고향인 선산도 방문하였다. 길재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친 집을 찾으니, 아버지 김숙자의 어린 모습이 어른거리는듯하여 가슴이 뭉클했다.

길재 선생 집의 현판에 ‘길재항절(吉再抗節)’이라고 크게 써져있었다. 세종이 《삼강행실도》의 충신 편에 길재는 굽히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는 ‘길재항절’이라는 항목을 두어 우리나라 대표 충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하였는데, 그 글을 따서 현판으로 만든 것이었다.

길재의 생가를 둘러보고 돌아서는 데 제자들과 함께 어린 시절 아버지가 글을 낭랑하게 외는 소리가 따라오는 듯하였다.


김종직은 울산의 병영에서 한양에 있는 제자들로부터 종종 편지를 받았다. 제자들은 공부하다가 해석이 어려워 벽에 부딪히거나 하면, 안부를 겸하여 편지를 보내곤 하였다. 김종직은 제자들의 편지를 받으면 직접 얼굴을 대하듯 반갑게 펼쳐보았다.

김종직은 제자의 편지를 읽는 대로, 시간을 내어 반드시 답장을 해주었다. 따뜻한 격려와 학문하는 기본자세를 강조하는 내용을 주로 담았다.

"학문을 닦는 것은 마땅히 조용한 마음으로 스스로 터득해야지 억지로 서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을 때는 문자를 읽어 넘기는데 급급하지 않고 조용히 깊은 뜻을 새겨 마음으로 묵묵히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어느 순간 막혀서 어려운 것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제자 이인형에게 편지가 왔다. 우쭐하는 기세와 자부심을 내려놓고 겸허하게 학문에만 열중하라고 당부를 해주었던 제자가 아니었던가.

김종직이 편지를 펼쳐보니, 그동안 자신이 읽은 책과 느낀 점을 이야기하고 다가오는 과거에 응시하려는 생각이 있는데 스승이 보기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스승님이 말씀하신 학행 일치를 위해,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정성을 쏟아 왔습니다. 마음을 높고 맑게 가지고 성인이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기를 수년간 거듭하니, 시간이 흐를수록 지난날의 저의 모습은 더욱 부끄럽게 다가옵니다. 얼마 전 경전을 읽는데 ‘자신의 내면에 있는 밝은 덕을 밝혔으면 벼슬에 나아가 그 도를 실현하는 일이 학문하는 사람이 할 일’이라는 구절을 읽고 마음이 격동되었습니다. 벼슬을 하려면 먼저 과거에 임해야 하는데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되었는지 제자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김종직은 제자의 편지를 처음부터 찬찬히 읽은 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선비가 인격을 연마하고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오로지 자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국가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닌가. 선비가 배운 바대로 행동하지 않고 제대로 수신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상태로 벼슬에 올라 권한과 힘을 가지면, 그의 지식은 남을 해치고 나라를 망치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지 않은가.’


김종직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자신을 충분히 수양하지 않으면, 안으로는 선과 악이 뒤섞여 분별할 힘을 잃게 되고 밖으로는 칭찬과 비난이 어지러이 들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 결국 화(禍)를 부르게 된다.’

김종직은 제자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자신을 충분히 수양하여 흔들리지 않는 도를 먼저 이루기를 바랐다. 이번 과거를 거르고 조금 더 마음을 닦은 뒤에 과거에 임하면 학문의 성취도 깊어져 좋은 결과를 얻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다만 제자가 잘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김종직은 붓을 들었다.

"가루는 체에 충분히 칠수록 고와진다.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본성을 염두에 두고 학문을 보다 깊이 파고들었으면 한다. 그런 연후에, 벼슬길에 나서서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 좋겠다.”

서찰을 봉투에 넣으면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스승의 말에 제자가 상심하지 않을까 마음이 쓰였다.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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