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가족 수첩

케임브리지의 영국신사

by 두류산

서른세 살, 나는 유학을 위해 직장을 잠시 떠났다.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영국행 비행기에 올라, 낯선 땅 케임브리지에 도착했다. 대학에서 제공한 임시 숙소는 여름방학 중 비어 있던 학생 기숙사였다. 가장 큰 침대에 네 식구가 모여 앉아, 영국 음식의 상징과도 같은 피시앤칩스를 봉투에서 꺼내 먹던 그 첫날밤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코끝을 간질이는 기름 냄새와 식초 향, 네 식구가 즐겁게 먹던 일은 따뜻한 가족 영화의 한 장면처럼 푸근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곧 살 집을 찾아 나섰다. 한국에서 아파트의 층간소음 문제로 늘 아이들의 발소리를 제지해야 했던 아내. 우리는 자연스레 마당과 정원이 있는 독립주택을 꿈꿨다. 세 살, 네 살, 한창 쿵쾅거릴 나이인 두 아들이 마음껏 발을 구를 수 있는 집은 우리 부부의 로망이었다.

드디어 케임브리지 교외의 고즈넉한 마을, 히스톤(Histon)에서 그 집을 발견했다. 두 가구가 붙어있는 흔한 테라스 하우스가 아닌, 당당한 독립주택이었다. 단정하게 깔린 프론트 야드(Front Yard)의 잔디도 좋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뒤뜰, 후원(後園)이었다. 거실 소파에서 통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후원은 작은 낙원이었다. 집주인이 얼마나 정성을 들여 가꾸었는지, 작은 연못에는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고, 꽃이 철을 따라 피는 정도가 아니라 십여 일 간격으로 새로운 꽃들이 번갈아 피어나는 화원(花園)이었다. 아이들이 잔디 위를 뛰어다니고 연못가에서 물고기를 관찰하며 웃는 모습은 우리 부부에게 큰 안식과 행복을 주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케임브리지 유학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꿈결 같던 시간을 보내고, 긴 여름방학을 맞아 두 달간 유럽 가족 여행에 나섰다. 유럽대륙을 샅샅이 훑고 오랜만에 케임브리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와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프론트 야드의 곱던 잔디는 크게 웃자라 키 작은 보리밭처럼 변했다. 민들레 홀씨는 주인의 빈자리를 틈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푸른 잔디밭에 노란 성운(星雲)을 이루고 있었다. 후원에 들어서니 더 큰 낭패감이 밀려왔다. 아름다운 화원은 온데간데없고, 잡초와 뒤엉킨 덩굴이 사방을 뒤덮어 어느 것이 꽃이고 어느 것이 나무인지 분간할 수 없는 정글이 되었다. 순식간에 아름다운 낙원은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변해 있었다. 아내와 나는 깊이 낙심했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관리를 제대로 못 하면 살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결국 우리는 너른 정원과 보기 좋게 하늘로 뻗은 나무들을 관리해 주는 대학 소속의 칼리지 기숙사 아파트로 이사하기로 했다. 문제는 이사를 앞두고 벌어진 집의 복구 작업이었다. 후원은 잡초를 뽑고 덩굴을 걷어내는 것 외는 손을 쓸 수가 없었고, 또 다른 문제가 집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예술적 기질이 충만한 둘째 아들의 작품이었다. 둘째에게는 집 안의 벽이 거대한 백지 캔버스였다. 거실과 방 하얀 벽의 아랫부분에는 아이의 상상력이 담긴 선과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아내와 나는 지우개로 지우며 씨름했지만,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이사 당일, 집주인 부부가 집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 나는 집을 망친 죄인이 되어 사과했다. 좋은 집에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여름휴가에서 돌아온 사이 정원이 망가졌고, 아이가 벽에 그림을 그린 점을 언급했다. 최대한 지웠지만 원상 복구는 어려웠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기꺼이 지불할 생각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가 실망하며 집을 점검한 후 배상액을 말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는 우리 가족이 이 집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니 고맙다고 말하며, 집 상태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점검은 그들이 직접 할 것이니, 이제 편하게 먼저 떠나도 좋다고 했다. 나는 당황했고, 아내도 머뭇거렸다. 그는 다시 부드럽게 우리에게 먼저 떠나라고 권했다. 고개 숙여 인사드리고 그 집에서 차로 나오는 순간, 그들 부부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우리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로 그때, 나는 '영국 신사(English Gentleman)'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닿았다. 그가 보여준 태도는 외국인 유학생의 서툰 실수와 명백한 집의 손상에 대해 책임을 묻기보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요즘도 가끔 케임브리지의 아름다운 집과 정원에서 깔깔거리며 뛰어놀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황폐해진 정원이 떠오르면 얼굴이 붉어지지만,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잉글리시 젠틀맨의 관용과 배려는 큰 고마움으로 남아있다. 그의 미소는 누군가의 서툰 실수를 대할 때, 상대가 겪을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을 먼저 헤아려주는 것이 진정한 배려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미소와 관용은 내가 이웃과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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