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가족 수첩

워싱턴 기러기

by 두류산

뜻밖에도 아내는 눈을 반짝였다.

“내년이 안식년이니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되겠네.”


쉰을 넘긴 나이에 워싱턴의 세계은행 본부에서 일하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군대와 대학에 묶인 아이들, 학교에서 일하는 아내, 누구도 동반이 어려운 단신 부임을 해야 하는 사정이기 때문이었다. 거절을 확인할 셈으로 이런 제안이 있다는 걸 아내에게 알려주었다. 아내는 예상과 달리 곧 합류하겠다는 말과 함께, 영국에 이어 미국에 살아볼 좋은 기회라고 했다. 아내의 말에 더 이상 좌고우면하지 않고 홀로 태평양을 건넜다.


사무실 건너편에 자매기관인 IMF 건물이, 두 블록만 걸으면 백악관 앞이다. 점심시간이면 링컨기념관과 워싱턴 모뉴먼트까지 산책할 수 있어,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인 워싱턴의 심장부에 선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심장 박동에 내 생체 리듬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나를 덮친 건 시차, 제트래그(Jet Lag)였다. 한국과 미국의 13시간 시차는 잔인했다. 밤새 푹 잤다고 생각하고 시계를 보면, 고작 한 시간 남짓 지나있을 뿐이었다. 분명 ‘밤잠’을 자고 있는데, 생체 시계는 한국의 환한 낮을 가리키며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날이 밝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억지로 잠을 청해 보지만 한 시간 뒤면 다시 잠이 깨었다. 밤새 잠과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낮에는 몽롱한 정신으로 서류 더미와 씨름해야 했다. 오십이 넘으면 한 시간 시차 조정에 하루가 걸린다더니 무려 13일, 거의 보름이 되어서야 겨우 워싱턴의 시간 속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시차의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기다린 것은 혹독한 몸살이었다. 비행기에서 쐰 차가운 에어컨 바람 탓에 든 감기 기운이 과로와 겹치며 악화한 것이다. 영화 상영 중간에 들어온 관객처럼, 업무를 따라잡느라 거의 한 달간 토요일, 일요일 없이 일에 매달린 결과였다. 몸은 완전히 그로기 상태로 심한 몸살에 꼼짝없이 누워있으나, 돌봐줄 사람은 없었다. 위로해 주거나, 내 몸 상태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었다. 역기러기 아빠, 가족은 한국에 두고 아버지만 해외에서 경제활동을 하며 생활하는 가장의 외로움을 실감했다.


다행히 은퇴 준비를 위해 요리동아리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식사 세끼를 아내에게 의존하는 ‘삼식이’로 살기보다는, 스스로 자활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그때 배운 것이 그저 기본기였다면, 워싱턴의 생활은 그야말로 종합 응용 편이었다.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는 건 물론, 주기적으로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욕조의 물때를 닦아내고 변기 청소까지 해야 했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다루는 일도 제법 익숙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카트를 끌며 장을 보았다. 처음엔 토마토와 블루베리 같은 쉬운 것들이었지만, 곧 모짤레라 치즈와 검은콩두부, 콩대(Green beans)와 마늘까지 쇼핑 목록은 난이도가 높아졌다. 나 홀로 먹는 밥이라도 식욕을 돋우기 위해, 접시 위에 시각적으로 맛있어 보이게 플레이팅(Plating)을 했다. 워싱턴에서 혼자 사는 남자의 일상은 그렇게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밤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킹사이즈 더블베드는 혼자 누워 반만 차지했다. 나머지 반은 아내의 자리다. 아내가 그리웠다. 아프니까 더 보고 싶었다. 마음이 허전한 밤, 생뚱맞게 다산 정약용 선생이 생각났다. 유배지 강진에 있을 때, 아내가 보낸 시집올 때 입고 온 붉은 치마. 선생은 그 치마에 그림과 시를 적어 하피첩을 만들었다지. 자원해서 온 나와 유배된 선생의 처지를 어찌 비할까 싶다가도, 멀리 떨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만큼은 닮았겠다고 생각했다.


텅 빈 침대 옆자리가 아내의 온기로 채워질 날을 꼽아보았다. 아내가 올 때쯤이면 영화 상영 중간에 들어온 기분이 아니라, 워싱턴 생활의 첫 번째 챕터를 훌륭하게 마무리한 자부심으로 당당하게 그녀를 맞이하고 싶었다. 낯선 땅에 단신 부임하는 일은 남자로서 홀로 서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며, 아내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온몸으로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매일 밤 침대 반쪽에 몸을 눕히며, 눈을 반쯤 뜨고 잠에서 깨지 않은 목소리로 “굿모닝!” 하는 아내의 아침 인사를 그리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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