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기회를 얻다 (3)

과인의 뜻에 매우 합당하다. 유자광은 진실로 기특한 재목이다

by 두류산

20장


유자광은 상소문을 품에 지니고 빠른 걸음으로 궁궐로 향했다.

승정원에 들리어 직접 상소문을 전하니, 승지가 물었다.

"웬 놈이냐?”

"얼마 전에 작고한 대사헌 유자환의 동생, 자광입니다. 성상(聖上)께 죽을 각오로 상소문을 올리니 꼭 전해주십시오.”


승정원에서는 유자광의 출현과 그가 올린 상소를 두고 승지들끼리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대사헌 유자환 영감의 동생인데 갑사라니?”

"영감의 부친이 여종을 건드려 놓은 얼자 동생이 있다고 하던데, 필시 그 자일 것입니다.”

"천민인 얼자 놈이 주상전하께 상소를 올리다니, 그런 전례가 있기는 한가?”

"그런 일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무시하자니 대사헌 영감의 동생이라는 것이 걸리고, 올리자니 주상께서 얼자 갑사의 상소까지 읽으라고 하냐고 역정을 내시지나 않을지......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도승지 윤필상이 승지들끼리 모여 의논이 분분한 것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들인가?”

좌승지가 도승지에게 보고를 올렸다.

"유자환 영감의 얼자 동생이라는 갑사 한 놈이 역적 이시애의 반란에 대응하는 상소라고 두고 갔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의논 중이었습니다. 상소 내용을 대개 살펴보니, 일개 갑사라는 것을 망각한 채 도총사와 장수들을 나무라는 허튼소리를 해대는 것이라......”

"그 상소문 이리 줘보게.”


윤필상은 상소문을 펼쳐서 읽었다.

승지들은 모두 도승지를 살폈다. 윤필상은 상소문을 다 읽고 좌승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주상께 올려드리게. 성상이 보신다면 싫어하지는 않으실 게야.”

윤필상은 4년 전 승정원에 들어와 여러 승지를 역임하면서 도승지가 된 오늘까지 세조의 측근으로 임금의 성품을 파악하고 있었다. 비록 갑사가 올리는 상소이지만 상소의 내용이 세조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만에 하나 세조가 갑사의 상소를 올렸다고 혼이라도 낸다면, 대사헌 유자환의 동생이라는 것을 들먹여도 될 것이었다.


세조는 유자광의 상소를 읽으면서 무릎을 쳤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부르는 대로 받아쓴 것처럼 그대로 써놓았던 것이었다.

세조는 유자광이 쓴 상소를 도승지 윤필상에게 보여주며 소리 내어 읽게 하였다.

윤필상은 미리 읽어보았던 터라 지체 없이 읽어 내려갔다.

"...... 전쟁에서 신속한 승리처럼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수들이 지체하고 진격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비유하건대 두 쥐가 굴속에서 함께 다투면 힘이 있는 자가 이기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장수들로 하여금 날을 정하여 전쟁을 하여서 재앙과 화가 더 번지지 않도록 서둘러 막지 않으십니까?”


세조는 도승지에게 상소문을 되받아 들고 다시 들여다보았다. 북방의 상황이 답답하던 차에 막힌 속을 뚫어주듯 후련한 글이었다.

"일개 갑사의 글이 아니냐? 저 함길도에 있는 장수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갑사만도 못한 자들이 아닌가.”

세조는 도승지 윤필상에게 상소를 돌려주며 말했다.

"이 글은 과인의 뜻에 매우 합당하다. 유자광이라는 자는 진실로 기특한 재목이다. 장차 그에게 벼슬도 주고, 그가 말한 것을 그대로 시행하리라.”

세조는 물러나는 도승지를 불러 말했다.

"그를 불러라. 직접 말을 들어보고 싶다.”


사관은 갑사가 임금에게 올린 상소 내용을 이례적으로 전부 실록에 남겼다.

또한 임금이 상소를 읽은 후의 반응을 상세히 기록하고 유자광의 인물평을 첨가하였다.

‘유자광은 전 경주부윤 유규의 얼자이다. 행동이 용맹스럽고 민첩하여 말을 달리며 활쏘기를 잘하고, 경전과 역사를 알며 문장을 잘하였고, 기개를 숭상하였다.’

이는 무오사화 이후의 실록에서 보이는 유자광에 대한 평가와는 달리 매우 우호적인 인물평이었다.


관복 차림을 한 승정원의 주서(注書)와 환관이 유자광이 묵고 있는 주막집으로 들어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갑사 유자광은 어서 나오시오!”

주막집의 사람들이 모두 나와 보고 있는 가운데 유자광은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소에 대한 주상전하의 비답(批答)이니 예를 다하시오!”


유자광은 궁궐을 향해 절을 하고, 꿇은 채로 상소의 말미에 적혀있는 임금이 내린 상소에 대한 답을 읽어보았다.

"상소를 살펴보니 너의 마음이 가상하다. 역적 이시애를 토벌할 방략에 대해 진술한 일들은 과인의 마음에 부합한다.”

환관은 임금이 상으로 내린 음식을 내어 주고, 내일 궁궐에 들어와 임금을 직접 알현하라는 전갈도 전해주었다. 유자광은 감격하여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1467년 세조 13년 6월 15일.

세조는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에서 실시한 경연에서 병법 강론을 마무리할 즈음에 어제 상소를 올린 갑사를 들라고 명했다. 강녕전은 말 그대로 편안하게 독서와 휴식하며 쉴 수 있는 건물로 왕의 침전이었다. 세조는 경연을 주로 이곳에서 행하였다.

유자광이 강녕전에 들어와서 고개 숙여 엎드리니 세조가 말했다.

"고개를 들라. 네가 어제 상소를 올린 유자광이냐.”

세조는 유자광의 날렵하면서도 굳세어 보이는 체격과 짙은 눈썹에 구리 빛으로 그을린 각이 진 얼굴이 한눈에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곰의 어깨에 범의 허리라는 말이 있더니,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세조는 기골이 장대한 유자광을 보고 기뻐하며 말했다.

"어제 상소에서 말한 이시애를 토벌할 책략을 직접 말해보아라.”

유자광은 상소에 쓴 내용을 거침없이 큰 소리로 아뢰었다.


세조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듣다가 유자광의 말이 끝나자 신하들을 보며 말했다.

"이자가 과인의 뜻에 합하는 말을 해주었다.”

유자광은 세조의 칭찬에 감읍하여 상소에는 쓰지 않았던 말을 더했다.

"만약 신에게 날랜 군사 3백을 주시면, 이시애의 목을 베어서 대궐 아래에 대령할 수 있겠습니다.”

세조는 젊은 무인의 호기로운 말에 호탕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진 세조는 유자광에게 술을 내려 격려하였다.


다음날, 세조는 경복궁의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문무백관들과 함께 조회를 하는 자리에서 역적 이시애가 북방을 도둑질하여 웅거하고 있는 상황을 논의하였다. 사정전은 신하들과 나랏일을 생각하여 결정하던 경복궁의 편전으로 공적인 업무를 보던 곳이었다.

세조는 갑사 유자광을 불러 문무백관이 모두 보는 자리에서 이시애를 잡을 대책을 다시 말하게 하였다.

유자광은 임금의 명을 받고 입시한 신하 모두가 잘 들리게 우렁찬 목소리로 대략 상소문과 같은 내용을 말했다. 그리고는 어제는 하지 않은 말을 보태었다.

"장수들이 진격하지 않고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옳지 못하나, 군대의 일은 먼 곳에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이곳의 판단으로 전장의 장수들을 지휘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세조는 유자광이 조정의 신하들이 다 모인 조회 자리인데도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을 보고 흡족해했다.

‘진실로 특별한 재목이다.’

세조는 즉석에서 유자광을 겸사복(兼司僕)으로 임명하였다.

겸사복은 왕을 최측근에서 지키는 경호 군사였다.

유자광은 감격하여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유자광은 하늘을 날아갈 듯이 기뻤다. 갑사를 지원하였을 때부터 변방에서 공을 세워 초급 지휘관인 교위(校尉)나 겸사복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실제로 꿈이 현실이 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겸사복은 왕의 경호 외에도 말을 부리는 재주가 있고 마상무예에 뛰어난 사람들을 주로 뽑았기에 전투력이 뛰어나 조선시대 여러 전투에서 큰 활약을 통해 승진의 기회가 많았기에 초급 무인들에게 선망의 자리였다.


유자광이 겸사복이 되어 임금을 가까이 모신 지 10여 일이 지났으나 북방의 전쟁터에서 올라오는 보고는 답답한 내용의 연속이었다. 전쟁을 하여 ‘적진을 돌파했다’ 거나 ‘이시애를 잡았다’는 내용이 아니라 적과 계속 대치하며 진격을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조는 속이 타들어갔다.

"이준과 강순 등이 오래 머물며 진격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단천(端川)·이성(利城)에 속히 들어가 대군(大軍)으로 진압하되, 곧바로 적이 주둔한 뒤쪽으로 들어가 웅거하여 앞뒤로 협공하면 적은 반드시 솥 가운데의 고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궁궐에서 생각하는 것만을 고집하여 지시하는 것도 불가하니, 마땅히 이준에게 말하여 다방면으로 대책을 세워서 기회를 타서 승리하게 하겠다.”

세조의 말을 들은 대신들은 임금의 말과 지난번 유자광이 한 말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임금은 신숙주에게 명하여 도총사 이준에게 보내는 서찰을 즉시 쓰게 하였다. 신숙주가 붓을 들어 쓰려고 하자, 세조는 바로 제지시켰다.

"잠깐 기다리시오!”

세조는 유자광을 시험해 보고 그의 능력을 헤아려보고자 했다. 세조는 유자광이 비록 천한 출신이나 신언서판(身言書判)은 어느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예로부터 관리를 선출하는 네 가지 기준은 신언서판이었다. 신(身)은 사람의 풍채와 용모인데, 세조는 유자광과의 첫 대면에서 건장한 체격과 짙은 눈썹에 큼직한 이목구비를 보고 이미 만족하였다. 언(言)은 말하는 재주인데, 임금 앞에서도, 문무백관들이 다 모인 데서도, 유자광의 말은 조리가 있고 분명하였다. 서(書)는 글씨로, 예로부터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것인데, 유자광의 상소문은 글씨마저 보통 수준은 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판(判)은 판단력인데 역적 이시애의 토벌 대책을 말할 때 유자광의 판단력은 세조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세조는 유자광의 상소문을 보면서 글을 짓는 재능도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실제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유자광더러 서찰의 초안을 써보라고 하시오!”

유자광은 여러 대신들 앞에서 임금이 전선에 있는 장군에게 지시하는 서찰을 써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으나 심호흡을 하고 붓을 잡았다. 오늘 논의된 내용을 상기하며 그동안 임금이 강조한 말을 보태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세조는 유자광이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이 붓을 들고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유자광이 붓을 놓자 세조가 신숙주더러 읽어보라고 하였다. 신숙주는 유자광의 글을 읽어본 후, 임금에게 아뢰었다.

"격식에 맞게 문장만 조금 다듬으면 그대로 이준에게 보내도 될 것 같습니다.”


세조는 호탕하게 웃으며 만족스러워했다. 임금이 유자광을 가상히 여기고 술을 내리고는, 엎드려있는 유자광에 다가가서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당의 태종은 호걸(豪傑)한 선비를 대함에 반드시 먼저 위엄으로 그 기상을 꺾은 연후에야 맡겨서 등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과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친애(親愛)할 따름이다. 너를 장수로 삼아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이시애를 토벌하게 하려 하나, 너는 미천하니 사졸(士卒)이 업신여겨 따르지 않을까 염려되어 그렇게 하지 못한다. 너는 그리 알도록 하라.”

유자광은 임금의 얼굴을 차마 볼 수는 없었으나 울컥하여 코끝이 시렸다.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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