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1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사신단으로 파견된 많은 사람 중 왜 오경석만이 조선의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개혁에 나선 것일까요? 왜 그만 시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들여 신문물을 구입하고, 이를 연구하면서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한 걸까요?
청에 파견된 사신을 총칭하여 연행사(燕行使)라고 부릅니다. 연행(燕行)이라는 말은 단순히 청의 수도인 연경(燕京, 베이징)에 간다는 말입니다. 반면 명에 파견된 사절단은 조천사(朝天寺)라고 불렸습니다. 조천사라는 말은 천자(天子, 중국의 황제)의 조정인 천조(天朝)에 조선이 조근(朝覲,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조천사라를 연행사로 낮춰 부른 것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청에 갖는 굴욕감과 불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명에는 정기 사신단을 연 4회 보냈으나 청에는 1회로 단일화합니다.1) 당시 지배층에게는 처음부터 변화하는 세상을 배울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19세기 청에 파견된 연행사는 무려 168회나 됩니다.2) 당시 국제적 상황을 이해하고 개혁을 추진하여 조선을 바꿀 수 있었던 기회가 그렇게 많았던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그 연행사에 오경석과 박규수가 있었다는 것이고, 불행인 것은 그 시기까지 그 둘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정세를 담은 『해국도지』가 조선에 처음 들어온 것은 오경석이 처음 중국을 방문하기 ‘8년 전’, 연행사에 의해서였습니다.3) 1차 아편전쟁으로 청이 굴욕적인 조약을 맺은 후 3년이나 지난 시점이지만 청이나 조선 모두 서양 제국주의 침략에 안일하게 대응했습니다.
오경석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전까지는 신서적에 일부 지식인들이 관심을 보였을 뿐, 서양은 지배층의 주류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조선은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비 오기 전에 하늘이 흐린 것처럼 위기에 앞서 그 징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징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준비한다면 위기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왜 그 징조를 청년 오경석만 위기로 느낀 걸까요? 주변 사람들은 그 위기를 정말 몰랐던 걸까요?
당시의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당시는 세도정치 시기입니다. 조선은 오랜 기간 명을 숭상해왔으나 이제는 오랑캐로 취급되던 청을 받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외국을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수많은 양반은 철저히 성리학적 명분론을 고수하기 때문에 서양과의 교류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양반이며, 청을 사대하는 마음이 없는 연행사의 정사입니다. 조선에는 이양선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해국도지』도 읽어보았고, 베이징에 방문했을 때 서양 세력이 청에서 활동하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목격합니다. ‘어! 이거 위기 아니야?’라고 여러분조차 내심 느끼는 바가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조선에 돌아와 상황의 심각성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을까요?
좀 더 상상해볼까요? 여러분이 연행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여러 대신들과 왕에게 상황을 보고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언급했듯이 성리학적 사고가 확고히 뿌리내린 사람들입니다.
왕에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요? 의견의 핵심은 그 짐승·갑각류 오랑캐가 우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요?
왕과 대신들, 그리고 함께 연행사에 파견된 관리들, 재야의 유생들까지 여러분의 의견에 못마땅해합니다. 하지만 아주 지난한 과정을 거쳐 여러분의 간곡하고 진실한 마음이 전해져서 왕이 마지못해, 어쩌면 불쾌한 채로 겨우 설득당했다고 칩시다.
이제 왕은 마뜩잖지만, 여러분의 의견을 따라 질문할 것입니다.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배경지식이 있는 분이라면 강화도조약 체결 후 조선에서 여러 가지 개혁이 있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설치합니다. 신식 군대를 만든다는 것은 구식군대를 차별한다는 것이고, 실제로 그러한 차별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이 군인들의 반란인 임오군란입니다.
개혁과 변화에는 반드시 기득권과의 다툼이 있게 마련이고, 그 과정은 하루아침에 해결되지도 않으며, 한 번의 실수로 임오군란과 같은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이러이러 저러저러 해야 합니다!’라고 의견을 내는 순간, 권력을 움켜쥔 세도 가문부터 그 아래 다양한 이권을 가진 세력들은 ‘개혁’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지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개혁의 종착지는 ‘신분제 폐지’이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왕에게 한 목소리로 ‘아니 되옵니다!’를 외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니 되옵니다!’의 목소리 속에는 조선의 운명과는 상관없이 여러분이 왕에게 총애를 받는 그 자체가 미워서 이 기회에 여러분을 관직에서 쫓아내려는 나쁜 정치인들의 의도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설득하는 과정에서 이미 건강이 나빠졌는데, 그 ‘아니 되옵니다!’의 소리에 여러분의 건강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화병이나 우울증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고, 단번에 정치기반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개화’를 주장할 수 있을까요?
당시의 지배층은 성리학이라는 시대적 명분론에 얽매여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맞는 말입니다.
성리학은 그 당시 종교였고,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맹목적일 때도 있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막강한 청의 군사력 앞에 현실적으로 화친을 주장한 주화파와 달리 전쟁에 패할 것을 알면서도 전쟁을 주장한 주전파는 그런 성리학적 명분론의 폐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사상적 성격 때문이었다고만 설명하면 문제를 일으킨 지배층 개개인의 책임을 더 무겁게 물을 수 없습니다. 성리학적 명분론을 바탕으로 아편전쟁·병인양요에 보인 지배층의 ‘무관심’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무관심을 가장한 ‘의도적인 외면’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어느 학자는 책을 1억 번 이상 읽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양반은 일생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4) 그런 그들이 세상의 변화를 읽는 눈치가 없었을까요? 그들은 세상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고, 개혁 과정의 이해타산을 미리 계산했을 것입니다. ‘신선’이 아니고서는 그런 무모한 개혁에 도전할 바보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일본의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이에 위기를 느낀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일본에 파견한 사신단)를 파견하게 되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정사와 부사는 각각 다른 말을 합니다.
정사는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부사는 일본의 침입 기미는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답서가 너무 오만불손하다고 생각하여 그 문서의 문자를 여러 곳 고쳐서 가져왔기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당시 통신사에 참여하여 부사의 일을 돕던 관리조차 정사와 의견을 함께하며 부사를 책망합니다. 당시 정사와 부사는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부사는 정사의 의견에 반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양측의 의견을 듣고 왕과 대신들은 갑론을박을 벌였는데, 최종적으로는 부사의 의견을 채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행되고 있던 전쟁 방어 준비는 취소됩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일본이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치려는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일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관리가 이를 보고하자 그 관리를 파직시킨 것입니다.5)
부사의 의견을 채택한 이유는 전쟁 준비보다 전쟁 준비를 하지 않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 많은 세금을 들여 백성들의 노여움을 사가며 전쟁 준비를 하자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전쟁 준비라면 백성들의 희생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양반 지배층의 재산도 당연히 징발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지배층이 가진 일반적인 생각이 아닐까요?
아편전쟁이 무려 2차례나 일어나 중국이 무릎을 꿇었고, 조선에는 병인양요로 물자가 끊기자 서울의 많은 사람이 피난을 갔는데 지배층은 상황의 심각성을 정말 몰랐을까요?
지배층이 당시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은 단지 누구도 손해를 보며 개혁의 총대를 메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득권층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외면이 꽤 오랜 기간 조선을 낙후된 상태로 버려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을 쉽게 경험합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을 조금만 다르게 바꾸면 분명 더 좋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거 내가 말하면 내가 덤터기 쓰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 때문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 현실 말입니다.
서로 도울 생각은 하지 않고 내가 아니면 된다는 ‘개인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상황이 이해는 됩니다. 그리고 자기 이익에 방해가 되는 문제는 곧잘 지적하지만 정작 문제 해결은 자신이 아닌 남이 하게 시키는 얌체족이 존재하는 현실도 알고 있습니다.
문제라고 인식은 하지만 손해는 당하고 싶지 않아 방치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조선 후기와 같이 공동체는 망가지지만, 누구도 그것에 책임지지 않는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청년 오경석만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도전’한 것이 오경석이었을 뿐이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이익’보다 ‘공동체의 앞날’을 더 걱정하는 순수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선한 마음'이 역경에 도전한 이유라는 점에서 너무 맥 빠지는, 감동 없는 결론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그런 마음을 지닌 청년의 등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 「조천사」·「연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2) 고태규, 「조선시대 연행사와 통신사의 해외여행 특성 비교 연구」, 『관광연구저널』 34, 한국관광연구회, 2020, 7쪽
3) 표가령, 「19세기 조선 문인의 『해국도지(海國圖志)』 독서 체험과 문학적 형상화-신필영(申弼永)의 『해국죽지사(海國竹枝詞)』 연구」, 『국문학연구』 43, 국문학회, 2021, 288쪽
4) 안세현, 「조선후기 초학자를 위한 독서 교육의 방법과 현대적 전망」, 『동방한문학』 83, 동방한문학회, 2020, 181쪽
정약용, 「김백곡의 독서에 대한 논변」, 『여유당전서 – 시문집(산문) 12권』,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네이버 지식백과
5) 「임진왜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