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1
프랑스의 침략을 앞에 두고, 당시 사신단의 대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애초부터 협상을 통해 충돌을 막으려던 것이 아니라 정세 탐지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악화되는 상황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청년 오경석은 달랐습니다. 그는 중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조선 사신단의 이름을 내걸지도 못했지만, 독자적으로 힘닿는 데까지 동분서주하며 나라 구할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사신단의 정사와 부사를 모시고, 그들이 서양 침략 경험을 가진 여러 중국 정책가들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였고, 중국인들로부터 프랑스 함대의 동태를 파악한 후 그들로부터 자문받은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 조선 정부에 알렸습니다.
이때 오경석은 중국인 교우관계를 적극 활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청과 프랑스 공사관 사이에 왕래한 외교 문서들까지 확보할 수 있었고, 그는 이 문서들을 필사하여 조선으로 보냈습니다.1)
자신의 낮은 처지나 자기 이익을 따지지 않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쓴 그의 행위는 단순한 통역관의 역할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당시 오경석이 확보한 정보는 병인양요 당시 매우 유용한 정보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프랑스는 타국 상황을 탐지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전쟁을 피하되 국경을 고수함. 부득이 상품을 교역할 때는 물물교역을 하도록 하고 금은으로 바꾸어 교역하지 않도록 함. 금은은 타국 손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 때문에 중국 재정이 고갈됨.
- 서양의 큰 배는 수심이 낮은 물가에 정박하지 못함. 지형을 이용하는 것이 좋음.
- 서양은 토지가 목적이 아니라 상업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 목적임. 본국의 저렴한 물건을 들여와 비싸게 팔아 그 나라를 망하게 함. 그들과 육전, 수전을 벌여 이기는 것은 모두 어려움.
- 등주에 서양의 병선 10수 척이 있는데, 조선을 공격하려는 배임. 배에는 5~6백 명이 있고, 군량은 1개월여를 지탱할 수 있다고 함. 보통 서양의 배는 하루에 1천 4~5백리를 가고, 수심이 낮으면 움직이지 못함. 서양의 배는 암초를 두려워함. 해안선이 복잡하면 작은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작은 배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음. 또한 말(馬)도 많지 않아 걱정하지 않아도 됨. 군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반드시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임.
- 조선은 오랜 기간 전쟁을 하지 않았으므로 수비만하고 전쟁에 나서지 말 것.
- 프랑스군은 이미 수년 전에 부유한 상인으로부터 돈을 빌린 후 이자도 갚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출병 시기가 불리함. 군량은 적을 수밖에 없음.2)
당시 프랑스 공사는 청의 승인 아래 병인박해가 일어난 것이므로 청을 공범으로 규탄하며 프랑스 함대의 조선 출병을 명령합니다. 하지만 청은 조선은 조공국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독립국이기 때문에 공범은 사실 무근이라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프랑스 함대는 조선과 청 사이에 주종관계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프랑스 공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고 반박하며 프랑스 공사가 아닌 프랑스 해군성의 의견을 따릅니다.3)
프랑스 해군성은 프랑스의 관심사는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이므로 잘 알지 못하는 조선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하고, 절대적으로 승산이 있는 일만을 계획할 것이며, 해군성이나 프랑스 본국 정부에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휘하의 병력만으로 원정을 수행할 것을 지시합니다.4)
프랑스 함대는 오경석이 파악한 정보대로 군수물자 부족으로 오래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천주교 포교 승인을 요구하며 조선침공을 알립니다. 그런데 이때 프랑스 함대는 마치 청 정부의 동의를 받고 출병하는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또한 프랑스 함대에 청나라 군인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는 잘못된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청·조선 양국 정부 사이의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경석은 온갖 노력 끝에 그 내용들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한 후 청은 프랑스의 침입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내용을 조선에 보고하게 됩니다.5) 사건의 마지막까지 36세의 청년 오경석이 활약한 것입니다.
이렇게 중국에서 오경석이 외교활동을 벌이는 중에 마침내 병인양요가 발생합니다. 서울에 있을 가족들 생각에 병인양요의 발발은 오경석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함대의 활동으로 서울은 한 달간 물자가 단절되었고, 오경석 가족은 모두 피난을 떠난 후 병인양요가 끝나자 돌아옵니다.6)
프랑스 함대는 오경석의 보고대로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함대의 압도적 화력에 강화도가 바로 점령되어 약탈당하였지만, 다행히 조선군의 기습작전으로 프랑스군은 철수하게 됩니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을 최초로 격퇴한 사건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의미가 큽니다.
당시 프랑스 원정대는 2개월여에 걸친 원정을 통해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 보복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베이징의 서양 외교관들은 수교 관계가 없는 조선에 침략하였으나 입항에 관한 아무 협상을 벌이지 못했고, 조선군의 기습을 받고 바로 철수했으며,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은커녕 흥선대원군의 쇄국을 더욱 강화했기 때문에 병인양요를 프랑스의 실패로 간주하였습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격퇴의 의미가 퇴색한 것은 흥선대원군이 여전히 제국주의 침략을 안일하게 인식했고, 근대적 군사 개혁 없이 그저 쇄국을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역경을 마주한 청년의 도전이 없었다면 군량이 부족한 프랑스 함대의 불리한 사정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청이 프랑스 함대 파병을 승인한다는 잘못된 정보로 조선 정부는 혼란에 빠져 더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청년의 활약으로 외세를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지만, 청년이 나선 이유는 단순히 병인양요를 견디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편전쟁으로 굴욕을 당한 중국과는 다른 자주적인 개화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조선은 더 완고한 쇄국의 길을 선택하였으니, 이것이 역사 속 청년이 경험하는 좌절감이자 시대적 한계인 것입니다.
1)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75쪽
2)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72쪽
3) 이주천 외,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재조명(再照明)- 조선과 프랑스의 대격돌(大激突)」, 『열린정신 인문학연구』8, 원광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7, 136쪽
4) 이주천 외,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재조명(再照明)- 조선과 프랑스의 대격돌(大激突)」, 『열린정신 인문학연구』8, 원광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7, 136쪽
5)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73쪽
6)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50-151쪽
7) 이주천 외,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재조명(再照明)- 조선과 프랑스의 대격돌(大激突)」, 『열린정신 인문학연구』8, 원광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7, 139-1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