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1
귀국한 오경석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양 제국주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느꼈을 것이고, 위기에 대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훗날을 위해 『양요기록』을 저술하여 병인양요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였고, 유홍기와는 북촌의 양반자제들을 교육하기로 논의합니다.1)
하지만 훗날 개화 정책에 따라 신식 군대를 육성할 때 양반자제들은 중인 교관에게 반말을 해서 중인 교관을 분노하게 만든 상황2)을 고려하면 오경석의 시대에 중인이 최고위 양반 자제에게 쇄국이라는 정부 정책에 반하는 교육을 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병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격퇴에 더욱 기고만장하여 쇄국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상황은 좋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병인양요 발생 3년 후, 다행히도 오경석은 고위직 양반 박규수가 서울로 돌아오자 그와 함께 그간 있었던 일과 나라의 앞일에 대한 심도 있는 의견을 교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박규수는 오경석의 의견에 따라, 오경석을 대신하여 양반자제들을 자신의 사랑방에 불러 모아 교육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등장한 또 다른 청년들이 바로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이었습니다.3)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의 노력으로 마침내 조선 최상층 양반자제 중심의 급진개화파가 형성된 것인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독특한 특수성을 갖습니다.4)
보통 역사에서는 불만의 당사자들이 개혁 세력을 형성하여 역사를 바꾸기 마련입니다. 1신분이었던 성직자, 2신분이었던 귀족에게 차별을 받아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게 된 3신분이 그렇고, 청에서 온건한 양문운동이나 급진적인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청을 지배한 만주족이 아닌 한족이었으며,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개혁 세력도 중앙의 에도막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차별 지역(쓰시마번, 조슈번)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조슈번 출신 정치인 중 여러분이 아는 사람으로는 안중근에게 살해당한 이토 히로부미와 암살당한 아베 전 총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는 소수 엘리트 지배층에 의해 갑신정변이라는 개혁 운동이 일어납니다. 결과적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러한 개혁 과정에는 한계가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지배층 주류 세력 내부에 개화사상이 심어졌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정작 개화사상을 교육 받았던 양반 자제들조차 오경석·유홍기를 중인으로 취급하였고, 그 때문에 개화사상 형성 과정에서 그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기보다는 ‘양반’이었던 박규수의 집에서 양반 동지들과 개화사상을 처음 시작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입니다.
개화사상의 선두에 있었던 그들조차 신분적 관념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인이었던 오경석·유홍기와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숨겼으니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그렇기 때문에 청년 오경석의 도전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오경석과 박규수는 개화파 양성에 뜻을 모은 후 여기서 멈추지 않고, 최고 권력자인 흥선대원군에게 개항의 뜻을 직접 주장하게 됩니다.
박규수와 양반집 자제를 교육하기로 결정한 후 2년이 지난 1871년,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합니다. 당시 청년의 시기가 끝나가는 41세의 오경석은 흥선대원군의 친분을 이용하여 대담하게 미국과 수교할 것을 주장합니다. 양반 고위직도 쉽게 설득할 수 없는 사안임에도 오경석은 단호히 주장합니다.6)
이때 오경석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20대 청년 시절 처음 베이징에 도착하여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충격을 받았고,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무너지는 광경을 베이징에서 목격하였으며, 병인양요를 경험하면서 이제는 서양의 침략 상황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외교 역량으로 전쟁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청년의 마지막 시기인 40대가 된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최고조에 이른 시절, 그가 수용만 한다면 조선의 근대화는 빨리 이루어졌을 것이고, 이후 역사는 다시 쓰여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 집권 초기, 세도정치의 폐해를 해결할 것이라는 백성들의 기대감과는 달리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벌어진 시기부터 과격한 민란이 곳곳에서 발생합니다. 그리하여 농민들 가운데 도산하거나 국경을 넘어 도망하는 자의 수가 증가합니다.7)
경복궁 중건 등 대대적인 토목사업이 이어지며 백성들의 불만이 증가하고 양반의 세력 기반인 서원을 철폐하거나 양반에게도 군포(軍布, 군대 복무 대신 옷감을 납부하는 세금)를 걷는 호포제를 실시하며 양반들에게도 불만을 삽니다.
국내 정치 현안을 개선할 방안이 필요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승리에 자만하였고,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겪자 서양에 대한 적개심만 더욱 키워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지 세력이 없던 중인 통역관의 건의는 쉽게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의 개항 요구는 단호히 거절됐고, 신미양요의 발발로 조선군은 강화도에서 처참한 패배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미군이 오래 머무르지 않고 물러가자 흥선대원군은 다시 자신이 승리했고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의지가 척화비에 잘 드러납니다.
미군의 퇴각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오경석을 ‘개항가’라고 지목하여 이후 오경석이 어떤 일을 건의해도 듣지 않게 됩니다.8) 그렇게 청년의 마지막 도전은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청년의 시절을 마감합니다.
청년 오경석이 마주한 상황은 중인이라는 자신의 신분, 성리학적 사회 분위기, 청에 의존하는 외교적 상황, 서양의 침략적 태도와 막강한 군사력, 조선 정부와 지배층의 무능 등 어느 하나 좋은 조건 없는 장애투성이의 역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청년의 시절에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실패한 인생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청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청년의 도전은 미완성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한 청년의 당찬 도전이 시대 변화의 단초가 된다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청년은 가장 적절한 환경에서 가장 완벽하게 갖춘 후 세상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숭고하고 순수한 마음을 바탕으로 어려운 처지에서도 도전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청년의 본분이자 본연의 모습입니다.
청년의 도전은 청년 시절이 끝남과 동시에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장년으로 이어지거나 또 다른 청년들에게 계승되어 결국에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업적으로 완성됩니다. 따라서 청년의 불완전하고 미숙한 실패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는 그저 청년이 도전 과정 중에 맛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경험일 뿐입니다.
오경석은 청년 시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북촌의 양반 자제들을 계속 가르쳤고,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에도 자주적인 조약체결을 위해 끝까지 노력합니다. 그리고 한 평생 나라를 위해 애쓰다 과로로 얻은 병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나 갑신정변 주역에 대한 사면이 내려지는 19세기 말, 오경석이 키워낸 청년들은 드디어 개혁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중인 통역관 청년 오경석이 시작한 일은 세도정치 시기 지배층의 시각에서 별 볼 일 없는 일이었을 테지만 그가 청년 시절 포기하지 않고 역경에 도전했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는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맙시다.
마지막으로 오경석이 꿈꾸었던 개화사상의 주요 내용 몇 가지를 요약하면서 글을 마무리합니다.
- 조선의 개혁은 반드시 자주 독립적으로 단행되어야 함. 조선 정부의 일부 대관들이 중국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개탄함. 외국에 의존하는 것은 침략자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 것과 같음
- 조선은 세계 대세에 보조를 같이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함.
- 서양열강이 철과 석탄으로 부강해진 산업혁명에 대해 인식하고, 이를 통해 공장과 산업을 일으켜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함. 선진적인 서양 과학 기술을 수용해야 함.
- 중국이 무역을 잘못하여 나라 경제가 빈약해 진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무역을 하되 조선이 손실을 입지 않는 무역을 해야 함9)
1)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19, 151쪽
2)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1, 인물과사상사, 2007, 252쪽
3)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52쪽
4)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69쪽
5) 김종학, 「조일수호조규 체결과정에서의 오경석의 막후활동」,『한국정치외교사논총』38,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6, 33쪽
6)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76쪽
7) 유영익, 「흥선대원군」, 『한국사 시민강좌』13, 일조각, 1993, 107쪽
8)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76쪽
9)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역사학회, 1985.9, 155-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