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서재필, #024 서재필의 출생과 청년 시절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by 연결고리

주요 업적과 생애 요약


#024 서재필의 출생과 청년 시절



서재필은 병인양요 발발 2년 전인 1864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후 7촌 아저씨의 양자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때 양어머니는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김씨 집안이었습니다. 서재필은 양외삼촌이 있는 서울로 이주하는데 여기서 오경석의 개화사상을 전수 받은 북촌의 양반 자제들, 김옥균·박영효 등을 만납니다. 서재필은 그들과 교류하며 급진적인 개화사상을 갖게 되고, 19세라는 꽤 젊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합니다.1)


관리가 된 그는 국방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군사학을 배웠고,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꿈꾸며 21세의 나이로 갑신정변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정변은 실패하고 역적으로 낙인찍히자 그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고, 남은 가족은 처형당하거나 음독자살하는 등 멸족의 화를 당합니다.2) 청년 서재필이 당시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갑신정변에 참여한 것은 청에 의존하는 사대주의적 개혁으로는 나라를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국가 상황에 대한 그의 의분은 청년의 순수한 열의였지만 그는 국가에 의해 냉정하게 버려집니다.


나라에 버림받은 22세의 청년이 생존을 위해 연고가 없는 미국에 도착했을 때 빈털터리인 상황에서 생계·언어·교육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역경에 맞서야 했습니다.


미국에 함께 도착한 동료들과 헤어진 후 홀로 남겨진 청년 서재필은 갖은 고생을 다 하지만, 미국인 후원자와의 뜻밖의 만남으로 학업에 집중할 수 있었고, 29세의 나이로 조선인 최초 양의학 의학사 학위를 받는 업적을 이뤄냅니다. 그리고 청년 서재필은 명문가 출신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고, 두 딸을 두게 됩니다. 개인 병원도 개업합니다.


서재필은 이미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고 이름을 자신의 본명을 거꾸로 한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로 바꿉니다.3) 서재필은 이제 한국말도 거의 잊고 완전히 미국인으로 살아갑니다.


국가가 자기를 버렸기 때문에 서재필 역시 조선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미국 시민권을 유지한 채 미국인으로 살았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한국에 방문할 때도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미국에서 역경을 극복하고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성공한 청년이었고, 갑신정변의 상처를 잊고 이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미국인 필립 제이슨은 인생의 중요한 도전을 마주하게 됩니다.


청년 서재필이 미국에 정착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을 당시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의 정치적 사건들이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정치적 혼란기에 갑신정변을 함께 일으켰던 급진개화파 박영효는 서재필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고, 조선의 개혁을 위해 그에게 귀국 제안합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자신에게 반역죄목을 씌웠던 정부가 그대로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갑신정변을 함께 했던 주역들은 이미 죽었거나,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신변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정치세력의 존재도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여건 속에서 ‘조선의 개혁’이라는 버거운 도전을 제안받은 미국인 청년은 박영효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였고, 그는 절대로 조선으로 되돌아갈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박영효가 두 번째 그를 찾았을 때, 청년은 마음을 고쳐먹고 위험한 도전을 수락합니다. 그리고 조국을 떠난 지 11년 만에 32세의 나이로 귀국합니다.


귀국 당시 그는 혼자였고, 여건은 예상한 것 이상으로 불리했으며 그의 신변은 매우 불안했습니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고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조성, 만민공동회를 개최, 학생 교육 등 조선의 계몽을 위해 온 힘을 바칩니다. 그는 조선에 도착할 당시에도 스스로를 미국인으로 소개하였지만 그 마음에는 조선인으로서의 사명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활동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러시아 공사, 그리고 미국 공사관의 강압에 의해 귀국 3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4)


청년 오경석과 마찬가지로 청년 서재필은 자신의 도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1) 이종찬, 「서재필의 생애와 사상-근대적 공중위생론의 대중적 전파자」, 『의사학』6, 대한의사학회, 1997, 213쪽
2) 이종찬, 「서재필의 생애와 사상-근대적 공중위생론의 대중적 전파자」, 『의사학』6, 대한의사학회, 1997, 213쪽
3)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14-15쪽
4)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15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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