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1881 별기군 설치
1882 임오군란, 서재필 과거 합격
1883 한성순보 발간, 서재필 일본으로 군사유학 / 20세
1884 갑신정변, 서재필 망명, 청프전쟁
1885 영국, 거문도 불법점령, 한성-인천 전신 개통
1888 한성-부산 전선 가설
1889 일본 제국헌법 제정
1890 최초의 노동절 행진 실시
1893 전화기 도입 / 30세
1894 동학농민운동, 일본 경복궁 점령, 청일전쟁, 갑오개혁
1895 삼국간섭, 을미사변, 을미개혁, 서재필 귀국
1896 아관파천, 서재필 독립신문 간행, 독립협회 결성, 제1회 올림픽 개최
1897 대한제국 수립
1898 서재필 미국 망명, 독립협회 해산, 청 변법자강운동, 영국·프랑스 파쇼다 사건
1899 독립신문 폐간, 경인선 개통
정치 개혁의 걸림돌 중 하나는 인간이 사는 세상에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한정된 자원을 사용하려고 하므로 사람들 간에 경쟁과 다툼이 발생하고, 때로는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이해관계자들의 격렬한 갈등 해결 과정에 공권력이 개입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을 독점하려는, 다시 말해 갈등을 유발하는 주체가 공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라면 갈등 해결은 좀 더 어려운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고,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마도 ‘혁명’이라고 불리는 거친 과정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마다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고, 대립 상황을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든다면 그런 사회에서 희망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충돌을 피하면서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 국민과 국가 사이에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각 주체 간의 건설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문제 상황, 이해당사자들의 입장, 시대의 요구사항 등을 제시해 주는 대화의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언론’입니다.
언론을 통한 대화는 갈등 주체들 간의 직접적인 대화는 아니지만, 언론은 ‘매체’를 통해 문제 상황을 설명하고, 서로의 의견을 전달할 뿐 아니라 사회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여 국민을 ‘계몽’하면서 갈등을 해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만약 언론의 활동이 자유롭고 공정하다면 정치 개혁은 좀 더 수월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신분제도가 무너지는 정치적 격변기에 그동안 정치에서 ‘외면’되어 왔던 국가 구성원들의 의견을 취합하고, 이들에게 바른길을 제시하는 언론의 존재는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그 언론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개혁을 위해서 존재하므로 관(官)이 아닌 ‘민간’에서 주도하는 언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민간 신문의 발행’이라는 타이틀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타이틀을 획득한 언론은 이미 잘 알려진 『독립신문』입니다.
32세의 청년은 어떤 이유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 발행이라는 무모한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시대 역경을 마주하며 더 좋은 세상 만들기를 희망하는 이 시대 청년들을 위해 청년 서재필의 도전 과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서재필은 책에서 다루는 9명의 인물 중 가장 오래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개화기, 일제 강점기, 광복 후 정부 수립기를 직접 경험하였으며, 한국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무려 88세에 생을 마감합니다. 한 마디로 한국 근현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 했던 위대한 민족운동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역사 속 인물은 우리와 같이 실존했던 ‘실수투성이’의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듯이 업적이 있다면 숨기고 싶은 약점도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역사 속 인물을 영웅화하여 그 인물들이 훌륭한 일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역사 인물에 대해서는 단점을 감추거나 더 나아가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인간은 좋은 일을 하다가도 불의한 일을 하고, 신의를 지키다가도 배반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그렇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서재필도 이런 점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서재필은 오랜 기간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만큼 논란도 많습니다. 84세라는 인생 말년에 남긴 자서전을 100% 신뢰할 수는 없다는 비판, 『독립신문』의 논설을 서재필의 글로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비판, 미국 교민사회에서 그를 신화적인 인물로 여겼다는 비판, 1920년대 이미 한국어로 말과 글을 구사할 수 없었던 서재필이 국내에 글을 기고하며 식민 지배에 순응할 것을 권유하는 인상을 주었다는 비판, 식민지화의 책임을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무지로만 돌리려 한다는 비판, 개인 상회를 운영했던 서재필이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여 파산하였다는 주장을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는 비판, 스스로 미국인임을 늘 강조했다는 비판,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고국에서 여생을 보낼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미국인으로 살다 미국에 묻힌 것에 대한 비판 등이 그것입니다.1)
게다가 서재필은 냉정을 넘어 차디찬 거만함을 주변 인물에게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고국에 돌아간 후 전 아내의 묘를 성묘하지 않거나 늙고 가난한 장인어른이 자신을 방문했을 때 2달러를 건넸던 행위 등이 그것입니다.2)
중요한 것은 인물의 역사를 읽을 때 편향되어 어느 한 쪽의 의견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평생 나라의 자주적 독립을 위해 힘쓴 서재필의 업적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서재필의 업적과 행동에 대해 여러분이 직접 생각하고 판단해보기를 바랍니다.
1) 주진오, 「서재필의 한국 근대사 인식」, 『한국학연구』21, 인하대학교한국학연구소, 2009, 306-307·311-312·315쪽
주진오, 「‘서재필 신화’ 왜곡된 진실들」, 시사저널, 1994.4.28
2) 김봉진, 「서재필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형성과 상극」, 『한국문화』41,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8.6, 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