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서재필, #028 19세기 말 중국과 일본의 상황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by 연결고리

시대 읽기


#028 19세기 말 중국과 일본의 정치적 상황


동아시아에서 19세기 말은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가 무너지고, 일본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시기였습니다.


1880년대 청은 청프전쟁에서 패배하여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이용하여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점점 확대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은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본과 갈등을 빚게 되고, 두 세력의 갈등은 1894년 청일전쟁 발발로 이어집니다.


청은 전쟁에서 패배하자 2억 냥이라는 막대한 배상금과 타이완·랴오둥 반도 등의 영토 할양을 규정한 시모노세키 조약을 굴욕적으로 체결합니다. 청은 전비와 배상금 해결을 위해 서양 열강으로부터 3억 4천만 냥이 넘는 돈을 빌립니다. 이것은 당시 청 재정 지출의 4.4배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으며1) 이 때문에 청은 서양 열강에 경제적으로 더욱 종속됩니다. 결국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청은 그 국제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됩니다.


전쟁의 패배로 양무운동의 한계를 확인하게 되자, 청은 정치체제와 교육 분야에서 더 급진적인 개혁을 이루려고 변법자강운동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이 개혁은 보수파의 반발로 겨우 100일간 추진되다가 좌절됩니다.


이후 서양 세력을 배척하며 서양 선교사를 죽이거나 외국 공사관을 습격하는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은 8개국 연합국에 의해 진압되고 청은 또다시 막대한 배상금을 물면서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 8개의 나라 중 유일한 아시아의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19세기 말 중국의 상황과는 반대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국제적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고, 근대적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일본은 조선과 중국을 더욱 앞서게 됩니다.


1880년대 일본은 별기군 창설에 일본인 교관을 파견하거나 갑신정변 지원을 약속하는 등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1890년에는 동아시아 최초로 ‘의회’를 개설합니다.


의회 개설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분제가 유지되는 전근대 시기에는 전제군주의 의사에 따라 법이 제정됩니다. 여기서 ‘전제(專制)’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사람의 의사는 존중하지 않고 제 생각대로만 일을 결정’하거나 ‘국가의 권력을 개인이 장악하고 그 개인의 의사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분제가 폐지되고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면, 전제군주가 법을 제정하던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 시스템이 요구되는데, 그것이 바로 의회제도입니다.


의회는 국민 개개인의 의사가 선거를 통해 반영되어 구성되며, 사회 각 분야의 의견을 모아 전문적인 입법 활동을 벌입니다. 따라서 서양 제국주의 국가의 부강함은 의회라는 근대적 정치체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의회이지만 전제군주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의회는 결코 쉽게 설립될 수 없습니다. 의회 설립은 곧 전제군주권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근대적 지배층과 의회 설립 세력의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일본에서도 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이 1870년대에 이미 시작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탄압해왔고, 메이지유신으로 근대로의 첫발을 디뎠으면서도 의회 설립까지는 무려 20여 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근대국가의 성공 여부는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면서 어떻게 의회 설립을 달성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선과 청 모두는 의회 설립을 이루지 못한 채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 때문에 일본의 ‘의회 설립’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회 설립을 이룬 일본은 그보다 1년 전인 1889년에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제국 헌법을 제정합니다. 헌법은 의회에서 제정되어야 하는데, 제국 헌법은 천황이 반포하는 형식을 띱니다. 그래서 헌법 1조에는 ‘대일본 제국은 만세일계 천황이 통치한다’, 헌법 3조에는 ‘천황은 신성하여 범할 수 없다’는 규정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국가의 주권을 천황에게 부여하였기 때문에 제국 헌법은 국민 주권을 온전히 실현했다고 볼 수 없는 한계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재산권과 신앙·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법으로 인정한 점은 당시의 조선이나 중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근대적인 변화였습니다.2)


헌법 제정까지 완수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하면서 동아시아의 패자로 떠오릅니다. 이 사건으로 조선에서 청을 몰아내었을 뿐 아니라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를 받게 된 일본은 사회 전반적으로 전쟁광의 분위기가 나타나는데, 청일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군사비 점유율을 총 세출액 대비 48%까지 늘립니다.3)


전쟁의 승리는 일본의 자랑이었겠지만,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이권을 획득한 일본을 서양 열강은 불쾌하게 여겼고, 러시아·프랑스·독일은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도록 일본에 강력히 권고합니다. 이 사건이 삼국간섭입니다. 당시 일본은 서양 열강과 직접 대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서양 열강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러시아의 힘을 확인한 조선은 러시아를 활용하여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는데, 이에 반발하여 일본은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상황에서 러시아와 계속 대립하였으며, 종국에는 청일전쟁 발발 10년 후 러일전쟁을 일으킵니다.


19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의 지각변동으로 한반도는 더욱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 박찬승, 「시모노세키 조약 120주년을 맞이하여」, 『역사와 현실』95, 한국역사연구회, 2015, 12쪽
2) 정혜선, 「제국헌법과 초기의회」, 『일본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1,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제국헌법」,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4, 인물과사상사, 2007, 141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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