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서재필, #029 19세기 말 조선의 부패 상황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by 연결고리

시대 읽기



#029 19세기 말 조선의 부패 상황


그렇다면 당시 조선의 정치적 상황은 어땠을까요? 1880년대 정부의 개화 정책에서부터 1890년대 대한제국이 수립되는 과정을 서술하기 전에, 조선의 부패 상황에 대해 먼저 언급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부패상황을 언급하기 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조선의 부패 상황은 절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조선이 부패하고 무능해서 나라가 망했다는 논리를 펴는 역사관을 ‘식민사관’이라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일본은 그들의 제국주의적 야욕과 침략행위를 포장하기 위해 ‘조선은 무능하여 망했고, 일본은 조선 식민지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식의 식민사관을 주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일본의 입장은 크게 바뀌지 않았는데, 문제는 우리나라 학자 중에도 일본의 식민사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조선의 부패 상황을 언급할 때는 ‘식민사관’에 빠지지 않도록 특히 주의가 필요합니다.


식민사관이라는 왜곡된 역사관 때문에 한국사 교과서에는 조선의 부패상이 심도 있게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선 백성들에 대한 일차적 책임이 있던 고종과 민비(명성황후)는 그저 일제에 의한 역사적 피해자로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를 사실 그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더 철저하게 반성해야 역사적 과오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말 조선의 부패 상황은 반드시 지적해야 할 문제입니다.


고종은 재위 10년 후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잃은 1873년부터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되는 1907년까지 무려 35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왕입니다. 1880년대 30대였던 청년 고종은 개혁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놓쳤고, 청년 시기가 끝나갈 1890년대 40대의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한 후 독립협회 해산, 황제권 강화라는 방식으로 역사를 후퇴시킵니다.


긴 재위 기간에 개혁의 기회가 많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권력을 포기하지도, 의회를 설립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고종은 시대 변화에 실패한 군주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대적 위기에 대응하지 못한 원인이 모두 청, 서양, 그리고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이라는 외세의 영향 때문만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요?


고종 시대는 세도정치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도정치 하면 매관매직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그렇다면 매관매직은 세도정치 시기에만 일어난 현상이었을까요?


고종 시기의 비리를 보여주는 자료 중 『매천야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황현이라는 학자가 조선 말기의 상황을 글로 남긴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도 있겠지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하기도 했고, 정통 역사서가 아닌 야사이기 때문에 역사적 오류도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황현은 이 책을 저술하던 중 1910년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로 일본에 저항한 의분을 갖고 있던 인물이므로 나라의 부패상에 대한 그의 분노만큼은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에 묘사된 고종은 부패한 인물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고종이 직접 권력을 장악한 1873년, 20대의 고종은 아들 순종을 얻습니다. 그리고 8도 강산을 두루 다니며 자식 잘되기를 비는 제사를 지냅니다. 이 행사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정부의 공금을 빌려서 사용하게 되고, 그 결과 1년이 못 되어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고 합니다. 그 후 매관매직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30대인 고종의 생일 선물에 관한 일화도 있습니다. 고종은 경상 감사(지역 최고 벼슬)의 빈약한 진상품 목록이 마음에 들지 않자 그것을 책상 아래로 던져버립니다. 반면 전라 감사가 바친 진상품의 화려함에는 감동했는데, 이때 ‘감사들은 이 정도 예를 차려야 한다’라고 칭찬합니다.


그리고 평안 감사로 부임한 한 인물이 끊임없이 선물을 진상하자 고종은 그를 칭찬했는데, 그를 이어 평안 감사로 새로 부임한 인물이 고종에게 금송아지를 바치자 그동안 칭찬했던 이전 평안 감사가 혼자서 금을 다 해먹었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당시 백성들은 가뭄이 심해 소나무껍질을 먹었던 시절이라고 하는데, 과장이 심하더라도 고종의 행실은 분명 문제가 많았습니다.


고종은 지방관이 올린 선물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별입시(別入侍)라는 방식을 통해 뇌물을 수취했는데, 별입시를 통해 고종을 만난 사람들은 신분과 상관없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매관매직은 세도정치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표현인데 고종 시대에도 과거 시험에 부정 합격을 하거나 돈을 주고 관직을 사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1884년 갑신정변 후 10년 동안 부패가 극에 달했다며 당시 상황을 통렬히 비판하기도 합니다.


국가의 부패는 당연히 최고 권력자가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최고 권력자가 비리를 자행했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가난했지만 고종은 부자였습니다. 1880년대 고종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를 위해 특별 조칙으로 광산, 인삼, 전신 등의 수입을 장악합니다.이 때문에 개화파의 입장에서 재정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정리되어야 할 청산 1순위는 바로 황실 재산이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황실의 재정이 정리되는가 싶었는데, 1897년 황제 중심의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황실 재산의 규모는 더욱 확대되어 정부 재정을 잠식하게 됩니다. 대한제국 당시 관리에게 월급을 주지 못할 정도로 정부 재정이 심각한 상황이 되자 황실 재산으로부터 대출을 받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더 당황스러운 일도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자국의 이권을 외국에게 넘기면서 황실이 직접 돈을 챙긴 일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국인에게 넘어간 운산 금광 이권인데, 미국인은 기존 계약을 수정하여 채굴 기한을 15년 추가 연장하는 대가로 1만 2,500달러의 현금을 고종에게 바칩니다.


1900년대 초 운산 금광에서는 많을 때 한 해 20만 톤의 금광석을 채굴했는데, 이는 당시 가치로 115만 달러에 해당했으니 15년 연장 비용은 한 해 생산액의 약 100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그 돈은 정부 재정으로 귀속된 것이 아니라 황실 재산이 됩니다. 고종과 제국주의 국가 모두 나라를 병들게 한 것입니다.


왕실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은 궁내부였는데, 이 관청은 황실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사행성을 조장하는 복권사업을 이용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당시 복권 1장 가격은 1원으로 당시 쌀 한 말에 해당할 정도로 비쌌으며, 복권사업가들은 발행액의 절반을 궁내부에 바쳤습니다.


게다가 궁내부는 주조이익을 얻기 위해 조악한 동전을 남발하여 물가를 상승시켰고, 상인에게 영업 특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매년 수만 냥의 세금도 받아 챙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가 안정되기는 어려웠습니다.


1897년부터 황실 재산이 정리되기 직전인 1907년까지 황실 재산을 관리한 내장원의 10년간 총수입은 집계할 수 없는 뇌물을 제외하고 4,350만여 원이었습니다. 1897년 정부의 1년간 수입이 500만 원이었고, 1907년에는 2천만 원에 불과했습니다.


황실 재산으로 대한제국 최대의 은행이 설립될 때 그 은행의 자본금은 불과 7만 6천 원이었습니다. 그리고 1907년 2천만 동포가 1원씩 모아 나랏빚을 갚자고 했던 국채보상운동의 목표금액은 1,300만 원이었습니다.


대외적인 외교 비용, 근대화 개혁을 위한 비용, 황실 공격 세력 진압을 위한 비용 등 황실 재산이 모두 개인의 사치를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라의 근대화나 독립을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기에는 그 사용 액수가 충분히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조선의 부패와 개혁 실패에 대해 고종의 역사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비 역시 고종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민비의 문제를 지적할 때 여흥 민씨라는 세도 가문의 폐해를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흥 민씨가 안동 김씨에 비해 매우 미미한 세력이었다는 의견이 있다고 해도 그들 세력에 의해 나라가 부패를 경험한 것은 사실입니다.


고종도 그렇지만 민비는 무당을 총애하였는데, 이 무당이 정치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국가 재정을 고갈시키자 이 문제에 대해 한 인물은 다음과 같이 상소를 합니다.


창고의 재정은 이 때문에 궁색하며, 관청 준칙과 관리 추천은 이 때문에 난잡하게 되고, 대궐 안은 이 때문에 엄숙하지 못하며, 형벌과 표창은 이 때문에 공명정대하지 못하고, 백성은 이 때문에 곤궁에 빠지며, 조정의 정사는 이 때문에 문란하게 되는데, 그 근원을 따지면 모두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숭상하기 때문입니다.


무당의 전횡을 비판하는 바른말을 했지만, 그의 비판은 민비를 향한 것이었고, 그것은 곧 국왕을 비판한 것이 되므로 조정 관리들의 강력한 처벌 주장에 따라 유배를 당합니다.


이후 갑오개혁에 의해 개혁적인 내각이 구성되고, 민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당시 내각은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한다는’ 조치를 발표합니다. 이 조치에는 민비가 민씨 척족 등을 등용하고 매관매직을 자행함으로써 사회 혼란을 초래한 문제점 등을 지적하는데, 이 조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일제가 사주한 측면이 있으므로 이 조치의 내용을 모두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민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민비의 서인 강등 조치가 발표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단행되자 서인 강등 조치를 단행한 내각은 몰락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고종은 서인으로 강등된 민비를 명성황후로 복권하였고, 2년간 진행된 국상으로 명성황후에 대한 비판은 자연히 사라지게 됩니다.


여흥 민씨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임오군란으로 알려진 구식 군대의 반란은 당시 군인의 월급을 지급해야 할 선혜청의 최고 책임자인 민겸호가 돈을 횡령하고, 오히려 항의 주동자를 죽이려 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민겸호는 민비의 오빠였습니다.


앞에서 고종에게 금송아지를 바친 평안감사의 이름은 민영준(이후 민영휘로 개명)이었습니다. 그는 매관매직의 달인이었고, 탐욕스러운 행위로 유배를 받고 풀려나기를 반복합니다. 이 인물은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 군대를 앞장서서 끌어들인 인물이며, 훗날 일진회와 한일합방 청원을 경쟁할 정도의 반민족 행위자가 됩니다.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고, 지금 언급한 것이 고종과 민비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위정자는 일반인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하며, 그것이 유교 시대의 왕이라면 더욱 그래야 했습니다.


고종과 민비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힘쓴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백성을 책임지는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그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제는 더 쉽게 침략할 수 있었고, 당시의 상황을 바꾸려던 청년 개화파들은 온전한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 김세곤, 「고종과 명성황후의 부패」1, 오늘 경제, 2020.11.30.
김세곤, 「고종과 명성황후의 부패」2, 오늘 경제, 2020.12.2
2) 김윤희, 「[왜?] 고종황제는 왜 황실재산을 만들었나?」, 『내일을 여는 역사』9,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2002.9, 163쪽
3) 박범, 「동양합동광업회사의 운산금광 운영과 광산도시 북진의 지역사회」, 『이화사학연구』 59, 이화사학연구소, 2019, 48-49·52쪽
4) 김윤희, 「[왜?] 고종황제는 왜 황실재산을 만들었나?」, 『내일을 여는 역사』9,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2002.9, 161·164-166·168쪽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2, 인물과사상사, 2007, 347-348쪽
5) 서영희, 「명성왕후 연구」,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2001.11, 117쪽
6) 한승훈, 「근대 시기 명성황후에 관한 상반된 인식과 담론 형성」, 『역사와 현실』111, 한국역사연구회, 2019.3, 90-92쪽
7) 한승훈, 「근대 시기 명성황후에 관한 상반된 인식과 담론 형성」, 『역사와 현실』111, 한국역사연구회, 2019.3, 88-90·93-94쪽
8) 김세곤, 「고종과 명성황후의 부패」1, 오늘 경제, 2020.11.30.
「민겸호」·「민영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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