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서재필, #030 1880년대 정부의 개화 정책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by 연결고리

시대 읽기



#030 1880년대 정부의 개화 정책과 임오군란



1876년, 오경석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강제로 개항됩니다. 그동안 쇄국으로 일관한 조선에게 개항은 생소한 경험이었으므로 먼저 개항한 청이나 일본의 사정을 조사하여 충분한 대비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조약 체결 직후, 조선 정부는 개항에 대한 별다른 대책이 없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조선 연안을 부지런히 측량하면서 조선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렇게 조선 정부는 4년을 허비한 후 1880년이 되자 통리기무아문이라는 개혁 총괄 기구를 만들고, 청과 일본에 사신단을 파견하면서 개화 정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개화 정책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근대 제도 수용을 통한 근본적인 개혁을 이룰 수 없었고, 수박 겉핥기식 정책을 답습하게 됩니다.


‘개혁’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존 것을 바꾸거나 없애는 방식으로 진행되므로 개혁으로 소외되거나 기존의 혜택을 상실한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개혁의 성패는 그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면서 개혁 합의에 이르도록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별기군의 운영은 실패한 개혁이었습니다.


조선은 1881년 최초의 근대적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합니다. 제국주의 침략이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군대의 개혁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개혁이었습니다. 별기군은 조선의 중앙군이었던 5군영에서 신체가 건강한 자 80여 명을 선발하여 처음 조직됩니다. 이들은 고종의 관심 속에 조직을 확대하게 되고, 일반 병졸 이외에 사관생도도 모집합니다. 그런데 최초의 사관생도는 양반 자제 중에서 선발되었고, 교육을 이수하면 무과시험을 거치지 않고 바로 종6품의 관직에 임명되었습니다.1)


양반 자제 중에서 선발된 사관생도들은 전근대적인 신분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들의 양반 신분을 자부하였기 때문에 군사 교육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중인 출신이었던 조선 교관에게 반말하고 그를 업신여겨 명령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이에 분노한 조선 교관은 생도들의 행동을 참을 수 없어 그 자리를 떠나버립니다. 생도들이 보인 행동은 강하게 처벌해야 했지만, 양반사회는 오히려 조선 교관에 분노하여 그를 처벌하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교관은 일본으로 망명해 버립니다.2) 그 조선 교관이 을미사변에 참여한 우범선이며, 그의 아들은 우리나라 농학 발전에 이바지한 우장춘 박사입니다.


별기군 운영의 더 큰 문제는 구식 군대에 대한 차별에 있었습니다. 별기군이 창설되자 정부는 5군영을 2영으로 축소 개편하였는데, 실직 압박을 받은 구식 군인들이 자기들보다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는 별기군에 증오를 품은 것은 당연했습니다. 게다가 군량이 풍부했던 대원군 집권 시기와는 달리 무려 13개월이나 급료가 체불된 상황은 구식 군인들이 마냥 참고 있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3)


구식 군인 모두를 대상으로 근대식 군사 개혁을 진행했다면 문제가 적었겠지만, 개혁의 방식은 처음부터 구식 군인을 차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양반은 전근대적인 지배구조를 신식 군대에도 그대로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기군의 생도들은 전근대적인 신분 관념에 젖어 교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구식 군대는 구조 조정을 당하면서 민씨 정권의 탐욕과 불법으로 최소한의 급료도 받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의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지자 드디어 구식 군인들에게 밀린 급료가 제공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고작 1개월 치 급료에 불과했고, 그조차도 곡식에 모래가 반 넘게 섞여 있자 구식 군인들은 격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임오군란입니다.


임오군란은 모래 섞인 1개월 치 급료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 부당한 상황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인 정부의 무능한 처리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당시 구식 군인들은 급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사건의 원인을 따지게 되고, 이 과정에서 선혜청 창고지기 등을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급료 지급 기관인 선혜청 책임자 민겸호는 주동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그들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 중 일부는 사형되리라는 소문이 구식 군인들 사이에 퍼지자 체포된 주동자의 구명운동이 진행됩니다. 하지만 구식 군인들을 진압해야 한다는 의견이 고종에게 전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구식 군인들은 결국 분노하여 임오군란을 일으킵니다.4)


구식 군인들의 반발은 거셌고, 민겸호를 비롯한 민씨 세력이 살해되고, 일본 공사관은 습격당합니다. 정부가 임오군란을 진압하지 못하자 고종은 흥선대원군에게 국무를 맡기고, 민비는 피난을 떠납니다. 이때 민씨 세력은 군란 진압을 위해 청에 파병을 요청하는데, 청이 군란 진압 후 흥선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됩니다.


그런데 외국 군대는 질서 정연하게 혼란 상황을 종결시켰을까요? 그리고 외국 군대의 파병에는 대가가 없었을까요? 청군은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민가를 습격·약탈하며 행패를 부립니다. 게다가 군란 소탕의 명목으로 군인 집단 주거지였던 왕십리와 이태원을 초토화하여 반중의식을 심화시킵니다.5)


정부가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들을 차별하여 군란을 일으키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그들로 민가를 약탈하고 자국의 군대를 진압하게 했으니 그 무능함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청은 군란 진압의 대가로 조선과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였고, 개항장 주변에서만 무역할 수 있었던 제한을 없애고 청 상인이 개항장을 벗어나 내지에서도 상행위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6)


조선의 종속적 지위는 조약으로 명확해졌고, 청에 부여한 혜택은 ‘최혜국 대우’에 따라 다른 나라에도 확대 적용되어 외국 상인이 서울에까지 와서 장사하게 되자 중간 유통을 담당했던 조선의 상인은 커다란 경제적 피해를 입습니다.


공업화된 국가는 대량생산에 기초한 공산품을 수출하지만, 그렇지 못한 조선은 농산물을 수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둘 사이의 무역으로 약소국에서는 부가 유출되고 동시에 곡물 부족 현상을 겪게 됩니다. 게다가 외국 화폐의 유통은 환율 문제를 일으켰고, 외국 상인의 가세로 화폐량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만성적인 재정난 해결을 위해 화폐까지 남발하자 인플레이션이 일어납니다.


훗날 정부가 곡물 유출을 막는 방곡령을 선포하거나, 외국 상인의 철수를 요구하는 상인들의 공동 저항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피해는 이미 시작되었고, 그와 같은 조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습니다.


경제적 피해도 심각했지만 조선 정부에 대한 청의 내정간섭은 더 큰 문제였습니다. 임오군란의 영향으로 청은 조선에 3,000명의 군대를 주둔시켰고, 청군 주도로 조선의 군대를 개편한 후 청군식 군사훈련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은 청이 추천한 외국인 외교 고문을 임명하기도 합니다.


당시 청에서는 조선의 국왕을 폐하고 조선을 중국의 지방으로 만들자거나 중국의 대신을 파견하여 조선의 외교와 군사 등의 실권을 장악하고, 조선이 일본에 지불해야 할 배상금을 대신 부담하여 일본의 조선 간섭을 막자는 식의 논의가 진행될 정도였으니 청의 정치 간섭 행위는 그야말로 도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7)


그런데 청뿐 아니라 일본도 조선에게는 골칫거리였습니다. 일본은 무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후 통상을 통해 엄청난 부를 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일본이 별기군 창설에 적극 참여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에 의해 교육이 진행되었으므로 ‘왜별기’라고 불렸는데, 이런 상황 때문에 일본은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공격 목표였습니다.8)


임오군란이 진압된 후 일본은 조선 정부에 자기들의 요구를 대부분 관찰시켜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 내용은 조선 정부가 주동자들을 체포해 처벌하고, 피살된 일본인의 장례를 치른 뒤 이들의 유족과 부상자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 측 손해배상비와 파병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부담할 것이며, 일본 공사관을 경비할 군대 주둔을 허용하고 아울러 특사를 파견해 공식적으로 사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군대 주둔은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고, 일본이 제시한 50만 원의 손해배상비는 국가재정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지나친 요구였습니다.9)


임오군란을 계기로 별기군은 폐지되었고,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가 서로에 대한 반감을 가진 채로 섞여 편제되면서 이들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과 반목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갑신정변이 일어날 당시 일본 지향적 군인들은 급진개화파의 편에 서고, 청국 지향적 군인들은 청군에 가담해 정변 세력을 진압하는 비극이 일어납니다.10)


개화 정책은 군대 내의 반감을 남긴 채 실패하고, 문제를 일으킨 집권 세력은 그대로 존재하였으며, 청은 조선의 종속적 지위를 명문화했고, 외국 상인들의 경제적 침탈은 더욱 심해졌으며, 청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주둔하게 된 상황을 고려할 때, 조선은 스스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주권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1) 최병옥, 「敎鍊兵隊(속칭:倭別技) 연구」, 『군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989.9, 99·105-108쪽
2) 다할편집실, 『한국사연표』, 다할미디어, 2009, 380-383쪽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1, 인물과사상사, 2007, 252쪽
3) 「임오군란」,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4) 「임오군란」,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5)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1, 인물과사상사, 2007, 257-258쪽
6)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1, 인물과사상사, 2007, 259-260쪽
「임오군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7)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8, 국사편찬위원회, 2002, 307-308쪽
8)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8, 국사편찬위원회, 2002, 299쪽
9)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8, 국사편찬위원회, 2002, 301쪽
10)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8, 국사편찬위원회, 2002, 309쪽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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