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이런 상황에서 오경석·유홍기·박규수로부터 개화사상을 배운 김옥균·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는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청에 의존하는 민씨 세력과 대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개혁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빌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차관도입이 실패하자 이들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집니다.
이때 청나라와 프랑스가 베트남의 주도권을 두고 청프전쟁을 일으키자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의 일부를 철수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급진개화파는 일본과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임오군란 2년 후에 일어난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하였는데, 정변 발생 5일 전, 김옥균은 고종과 독대하여 거사 계획을 밝힙니다. 그리고 고종은 급진개화파의 계획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정총국 축하연에서 정변이 시작될 때 아무도 죽이지 말라는 고종의 명령을 무시하고 정변 세력들은 수구세력들을 살해했고, 고종은 분노합니다. 정변 세력은 혁신 정강을 발표하며 개혁을 추진하려 했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납니다.
이들 정변 세력은 대부분 20~30대의 청년이었으며, 일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일본 공사관이 무력을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흔쾌히 수용합니다. 또한 정변 자금조차 마련하지 않아 정변 중 병사들이 밀린 급료의 지불을 요구하자 이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습니다. 일이 급진적으로 추진되었으니 그만큼 정치적 상황 파악이 부족했고, 거사 준비도 미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나라의 개혁을 위해 힘썼으나 결과적으로는 국가의 반역자로 낙인찍힙니다. 그래서 정변에 실패한 급진개화파 세력은 죽임당하거나 외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는데, 정변의 중심인물이었던 청년 김옥균은 정부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고, 청년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떠납니다.1)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개혁·청일전쟁이 동시에 진행되기까지, 갑신정변 이후 10년의 기간은 조선이 자주적으로 개혁을 이뤄야 할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임오군란 이후 갑신정변까지 청군이 진압하면서 조선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갑신정변 이후 청은 10년간 조선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데, 그 역할을 맡은 인물이 바로 위안스카이입니다. 고종은 처음에 위안스카이에 호감을 가졌으나, 그가 노골적으로 내정간섭을 일삼자 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민비일파는 당시의 상황을 타개하고자 러시아에 접근합니다. 이에 청은 조선을 감시할 목적으로 청에 끌려간 흥선대원군을 다시 조선으로 불러들입니다.
위안스카이는 권모술수가 능한 인물이었는데, 조선이 러시아와 가까워지는 것을 막으면서 친러 관리를 처벌하려고, 러시아와 교류한 간신들을 처벌하기 위해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는 거짓 전보를 조작합니다. 그러면서 그 전보를 빌미로 러시아군과 계략을 꾸민 사람들을 처벌하라고 국왕을 협박합니다. 결국 고종은 관리들은 하옥시키는데, 위안스카이는 이런 방식으로 대신들을 협박했고, “병사 500명만 있어도 국왕을 폐하고, 그 주변의 무리를 납치하여 톈진에서 심문받게 하겠다”는 식으로 국왕 폐위 문제를 함부로 거론하면서 조선을 능멸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러시아의 세력 확대 방지를 이유로 조선의 주권을 무시한 채 거문도를 무단 점령하는 사건까지 벌어집니다. 이런 국제적 대립 상황을 위안스카이는 교묘하게 이용하였고, 조선 왕실에 대해 더욱 방자하게 행동했습니다.2)
그는 조선 정부의 차관도입도 적극 방해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개혁을 위한 차관도입이 절실했는데, 청은 매번 조선의 차관교섭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청은 차관의 대가로 전설부설권 등 각종 이권을 독점하게 됩니다.
조선의 경제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으므로 차관을 상환하기 위해 다시 차관을 들이게 되어 외채는 더욱 늘어납니다. 고종은 외채 상황 독촉과 미상환에 따르는 이권 침탈에서 벗어나고, 청의 지나친 간섭을 물리치기 위하여 외국인 고문들을 통해 끊임없이 차관도입을 추진하지만 위안스카이의 집요한 간섭으로 대부분 실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친청 인사를 정부에서 배제하고 민씨일파를 정부 요직에 앉혀 세력 기반을 강화하고 자주적인 개혁을 위해 노력합니다. 특히 미국인 교관들로 하여금 근대식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청국식 무기에 대체할 무기 구입 등을 추진하려던 군제개혁은 큰 의미가 있었지만, 이 역시 재정 부족과 청국의 방해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합니다.3)
이 시기 정부 주도의 신문을 다시 발행하거나, 전신·전화와 같은 근대적 기술을 도입하고,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을 설치하는 의미 있는 변화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의 내정간섭은 너무 집요해서 개혁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외세의 내정간섭만이 개혁의 걸림돌은 아니었습니다. 부정부패라는 조선 내부의 문제는 여전히 계속되었고, 농민들의 누적된 불만은 결국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분출됩니다.
1)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1, 인물과사상사, 2007, 330-339쪽
2)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9, 국사편찬위원회, 2002, 20·22-24쪽
3)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9, 국사편찬위원회, 2002, 87·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