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동학농민운동의 발생은 갑신정변 이후 10년간의 개혁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를 계기로 농민들이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전근대 시기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는 보통 민란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지방관이 반복해서 부정을 저지른다는 것은 정부가 그를 감독할 역량이 부족하거나 정부도 함께 부정을 저지른다는 것을 뜻하므로 민란의 발생은 나라가 이미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민란의 원인을 부정을 저지른 지방관 한 명의 문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가 지방관의 탐학을 걸러내지 못하는 상황일 때 농민들은 자신들의 부당한 상황을 당당히 거론할 수 있을까요? 신분제도가 존재하는 상황, 막강한 권한을 지닌 지방관의 부정부패가 방치되는 상황이라면 농민들은 그저 참고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농민들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는 정의의 사도라기보다는 이제는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문제의 개선을 요구하도록 내몰린 절박한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의 요구는 언제나 겸손했고, 탐관오리의 처벌 이외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저항이 국가에 대한 ‘반란’으로 보이지 않도록 노심초사했습니다.
이런 농민의 입장을 정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크게 불거진 경우에만 관련 지방관을 처벌하거나 잘못을 일부 바로잡으면서 농민들을 기만적으로 회유합니다. 그리고 농민들이 설득당해 해산하면 민란 주동자를 잡아 처벌하면서 민란을 진압합니다.1) 따라서 민란은 일반적으로 실패하기 일쑤이며, 정부의 부정부패도 개선될 수 없었습니다.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도 다른 민란과 유사하게 지방관의 횡포로 시작됩니다. 고부에 새로 부임한 군수는 이미 여러 지방의 수령을 역임하며 탐학 행위로 악명을 떨쳤는데, 이곳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습니다.
먼저는 이미 저수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보를 새롭게 수축한 후 물을 이용하는 대가로 과중한 수세(水稅)를 물려 무려 700여 석을 거둡니다.2) 지금은 쌀을 무게로 표기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부피로 표기하였는데, 민간에서 1석은 대략 120리터로 통용되었습니다.3) 따라서 700여 석은 무려 8,400리터, 대략 축구장 바닥 크기의 3층 높이 건물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정도의 양입니다. 게다가 새로운 보를 만들 때 농민의 노동력은 임금 없이 강제로 징발했고, 남의 산에서 수백 년 묵은 나무도 마구 잘라 씁니다. 조금 살만한 집에는 효도를 하지 않는다거나 음행을 한다는 허무맹랑한 죄목을 씌워 재물을 빼앗았는데, 그 액수가 무려 2만 냥에 달했습니다.4) 이 금액은 1880년대 평균 정부 예산의 1/100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5) 이뿐 아니라 정부에 세금을 바칠 때는 일부러 나쁜 쌀을 사서 갖다 바치고 차익은 모조리 착복하였고, 자기 아버지의 공을 기려 비각을 세운다면서 농민들에게 천여 냥을 강제로 거두기도 합니다.6)
그런데 문제는 지역 군수의 탐학만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토지의 상황을 살펴 전답을 측량하거나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고, 지방관의 부정행위까지 처벌할 수 있었던 ‘균전사’는 고부군의 황무지 개간에 몇 년간의 면세를 약속했으나 황무지를 개간하여 추수를 하자마자 바로 그해 세금을 거둬들입니다. 이를 분하게 여긴 농민들이 이듬해 땅을 묵혀 농사를 짓지 않았는데, 균전사는 소득이 없는 땅에 여전히 전년과 같은 세금을 받아 챙깁니다. 지방의 세금을 서울로 운반하는 ‘전운사’는 선반 수선비나 파손비 등 세금 이외의 비용을 거두고, 이에 불응하는 농민들을 잡아 고문하기까지 합니다.7) 다시 강조하지만 지방관의 부정부패는 지방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문제였습니다.
지방관의 폭정에 농민들은 민란을 일으켰지만, 다른 민란들과 마찬가지로 신임 군수의 회유에 농민들은 해산합니다. 그리고 만약 잘못을 바로잡았다면 사태는 확대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건처리를 위해 임시 파견된 ‘안핵사’는 신임 군수와는 다르게 예전의 방식대로 민란의 주동자를 반역의 죄목으로 잡아 죽이고자 했고, 그의 역졸은 부녀자를 강간하고, 집을 불태우고, 농민의 처자식을 잡아 들이며 살육을 감행하는 강경 탄압으로 일관합니다.8)
결국 농민들은 다시 봉기하여 정부군과 전투를 벌여 이기고, 전주성에 입성합니다. 전주에는 지금도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보관하고 있는 경기전이 있는데, 전주는 조선왕조의 고향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조선왕조 수립과 동시에 전라감영이 설치된 곳입니다. 감영은 조선시대 최고 지방관인 관찰사가 직무를 보는 관청으로 조선 8도에 하나씩 설치된, 지금의 도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전주성이 농민군에 의해 점령되었기 때문에 정부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크게 잘못한 것은 ‘자주적’으로 농민군과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너무 쉽게 청에 다시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갑신정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을 그렇게 경험했으면서도 결국 위기가 닥치자 다시 외세에 도움을 요청한 상황을 볼 때 국내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려는 조선 정부의 의지는 매우 부족했습니다.
당시 농민군은 ‘일본 오랑캐를 몰아낼 것’이라든가 ‘탐관오리를 없앨 것’ 등을 주장하면서도 그들의 행위가 국왕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기에 노력9)했기 때문에 농민군과 정부는 협상의 여지가 충분히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농민군은 정부와 협의하고 최종적으로는 전주화약을 체결합니다. 따라서 청에 파병을 요청한 행동은 정권 유지를 위한 안일하고 섣부른 행동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관료들은 실정을 반성하고 개혁을 하자는 의견이었고, 청에 군대를 빌리자는 주장에도 반대하였지만, 고종에게 금송아지를 바치며 부정부패를 일삼던 민영준은 왕실과 함께 청군을 빌리는 계획을 밀어붙입니다.10) 그들에게는 구조적인 부정부패의 청산보다 권력에 도전하는 농민군을 강력 진압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전주화약을 체결한 농민들은 탐관오리 제거나 외세 배격 이외에도 토지 재분배나 노비 해방, 천민들에 대한 차별 폐지 등을 주장했고,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일부 반영되기 때문에 동학농민운동은 조선의 근대화에 일정 부분 이바지합니다.
고부에서 시작된 농민들의 저항은 전주화약을 계기로 일단락되고, 사태는 진정됩니다. 그런데 이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것입니다.
1)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9, 국사편찬위원회, 2002, 320쪽
2)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9, 국사편찬위원회, 2002, 311쪽
3) 정연식, 「조선시대 이후 벼와 쌀의 상대적 가치와 용량」, 『역사와 현실』, 한국역사연구회, 2008.9, 315쪽
4)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9, 국사편찬위원회, 2002, 311쪽
5)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4, 국사편찬위원회, 2002, 53쪽
6)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9, 국사편찬위원회, 2002, 311쪽
7)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9, 국사편찬위원회, 2002, 311-312쪽
8)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9, 국사편찬위원회, 2002, 318·320쪽
9)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9, 국사편찬위원회, 2002, 329쪽
10)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2, 인물과사상사, 2007, 1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