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일본은 어떤 이유로 조선에 파병했을까요? 일본의 최종 목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것이었기 때문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10년 전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일본은 갑신정변 다음 해에 청과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양국 군대 철수와 이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 상대국에 상호 통보하자는 내용이 포함됩니다. 그래서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은 조약에 근거하여 파병 상황을 일본 측에 알렸고, 일본은 일본인 보호를 명분으로 조선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조선에 군대를 보낸 것입니다. 이때 일본은 조선 정부의 파병 중지 요청을 묵살합니다.1)
동학농민운동 문제가 일단락되자 정부는 청·일 양국의 철병을 요구합니다. 이때 일본의 군사적 행동을 걱정했던 청은 조선의 요청에 즉각 응했고, 일본군 역시 명분이 없어지자 처음에는 철병에 합의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곧 합의를 번복하고, 조선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계속 증파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군대 주둔의 명분이 없게 되자 이제는 일본인 보호가 아니라 ‘조선의 내정개혁 요구’라는 새로운 명분으로 군 주둔을 지속합니다.2)
그런데 당시 일본의 요구는 단순히 조선의 내정개혁을 희망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조선의 내정개혁 요구에 시한부로 회답하라는 폭력적이고 황당한 강요였습니다. 이에 조선은 군대를 철수하면 내정개혁을 단행하여 일본 정부의 호의에 보답하겠다고 답변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하고 ‘청국과의 모든 조약 폐기’와 ‘청국 군대의 즉시 철수’라는 더 강력한 조건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은 처음부터 전쟁 구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3)
조선 정부가 계속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자 일본군은 드디어 침략 야욕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바로 군사력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한 것입니다. 새벽 4시에 시작된 만행은 불과 30분 만에 종료되는데, 조선의 주권을 무시한 일본의 행태에 격렬하게 맞서 저항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력한 대응 수준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2일 후 아산 근해인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함대를 선제공격하며 청일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다시 2일 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상태에서 민씨 세력은 쫓겨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갑오개혁이 실시됩니다.
청·일이 전쟁을 벌였으나 그 전쟁터는 한반도였고, 특히 평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인은 막대한 피해를 당합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은 3일 만에 평양을 점령하여 조선 정부와 열강들을 놀라게 했는데, 최종적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전근대시기 내내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누리던 국제적 지위를 일본이 대신 차지하게 됩니다.4)
청일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을 추진하고, 그 결과 전근대적인 신분제가 드디어 종말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이 군사력을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한 후 마치 자기들에 의해 개혁이 진행된 것처럼 상황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갑오개혁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존재합니다.5)
중요한 것은 우리집에서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큰 사건을 경험한 후 스스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찰나에 도둑놈이 우리집의 개혁을 위해 쳐들어왔다고 하면서 우리가 처음부터 진행하려던 개혁에 숟가락 얹는데, 바로 그 도둑놈이 일본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일본은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일본 의존적으로 조선의 군사력을 편성하고, 철도 부설권·전선 가설권·해군항 조차 등의 특권을 장악하는 도둑질을 실제로 자행합니다.6)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한 달 후 경복궁에서 철수하는데 이때 경복궁을 지키는 조선군에겐 방망이만 주어졌고, 나중에 소총이 지급되었지만 화약 휴대는 금지됩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경복궁에서 포 20문, 소총 3,000정을 비롯한 각종 무기와 귀중품을 전리품으로 노략질합니다.7) 이런 상황을 목격하던 정부 관계자들의 심정은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일본의 경복궁 점령 소식에 동학농민군은 2차 봉기를 일으키지만,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 일본은 박영효와 같이 갑신정변으로 망명했던 급진개화파 인사를 이용하여 조선 정부를 이끌도록 합니다.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갑신정변 당시 민비와 대립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를 활용하여 조선 정부를 통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의 의도와는 다르게 일본의 강압적인 정치 상황을 극복하고자 오히려 민비와 일시적으로 협력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일본공사관의 불만을 사게 되어 다시 조선에서 쫓겨나는 존재가 됩니다.8)
1) 안외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동방학』42,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2020, 285쪽
2) 안외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동방학』42,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2020, 286-288쪽
3)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2, 인물과사상사, 2007, 184쪽
4)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2, 인물과사상사, 2007, 184-185·188·195·198쪽
5)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2, 인물과사상사, 2007, 198쪽
6) 주진오, 「특별기획:갑오개혁 청일전쟁 100년 갑오개혁의 새로운 이해」,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94.8, 44쪽
7)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2, 인물과사상사, 2007, 194쪽
8)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2, 인물과사상사, 2007, 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