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서재필, #034 을미사변, 아관파천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by 연결고리

시대 읽기


#034 을미사변, 아관파천



전쟁 1년 만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며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더불어 타이완, 랴오둥반도를 할양받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독일·프랑스는 일본의 세력 확대에 제동을 거는 삼국간섭을 일으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청에 랴오둥반도를 반환하게 되고, 이후 일본은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와 대립하게 됩니다.


민비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친러 정책을 펼쳤고 일본은 이를 위기로 판단했습니다. 이 상황을 돌파하고자 일본 공사는 ‘여우사냥’이라는 조선왕후 시해 작전을 실행합니다. 이것이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입니다.


을미사변은 일본인 자객에 의한 ‘왕비의 안타까움 죽음’에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보다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감히 한 나라의 왕비를 처참하게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주도면밀하게 은폐하려고 했던 ‘일본의 기만적 잔학성’입니다.


민비시해 계획의 개요는 반민비세력의 거두인 흥선대원군과 일본에 의해 조직되었으나 곧 해산 위기에 직면한 훈련대 군인을 이용하여 쿠데타로 위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건의 원인을 조선 내부 문제로 돌리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반민비세력이라도 왕비를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구심 때문에 조선인만 이용하려던 처음 계획을 버리고 일본인 자객을 동원합니다. 이렇게 하면 사건이 발각되더라도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1)


이런 배경 때문에 사건 당시 일본은 대원군을 궁에 들이고, 훈련대를 내세워 왕궁을 침입합니다. 그리고 기괴망측한 복장을 한 일본인 자객과 조선인 복장을 한 일본 순사들을 난입시켜 일본인 개입을 완전히 숨기기 위한 위장전술을 펼칩니다. 그래서 혹시 일본인 가담이 밝혀진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대원군측의 요청에 의해 가담한 것으로 조작하려고 했습니다.2)


결과적으로는 일본인 자객에 의해 민비가 살해되지만, 을미사변은 일본수비대 약 600명, 조선인 훈련대 약 800명, 일본 자객 2조로 구성된 대규모 침략단에 의해 경복궁이 공격을 받은, 치밀하게 계획된 주권침해 사건이었습니다.3)


안타까운 것은 민비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여러 설이 있을 뿐 지금도 정확한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민비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했고, 민비 살해 시점에는 일본인 자객과 일본인 군인만 있었기 때문입니다.4) 민비의 시체는 증거 인멸을 위해 화장되는데, 이 일련의 만행이 조선의 왕궁에서 거리낌 없이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을미사변에서 기억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일본의 회유에 넘어간 우범선 같은 민족반역자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살펴봤듯이 그는 양반 자제들에게 무시를 당한 별기군 교관이었는데, 갑오개혁 당시 일본의 주도로 조직된 훈련대의 교관이 됩니다. 그런데 민비가 훈련대를 해체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사건에 가담하는데, 사건 당시 대부분의 훈련대 병사들은 그들의 행동을 우범선의 명령에 따른 궁궐 호위 야간 훈련으로 인식합니다. 이 때문에 훈련대 병사들은 정확한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과 한 팀이 되어 궁궐 호위병들과 총을 겨누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민비를 죽음에 이르도록 합니다. 우범선은 사건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지만, 결국 민비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에게 암살당합니다.5)


을미사변은 고종이 보는 앞에서 폭력적인 살상이 이루어진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일본의 압력에 의해 조선 정부는 스스로 일본의 가담을 부인하는 황당한 공문을 만듭니다. 이때 조선 정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참담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일본은 이렇게 사실을 조작하고 은폐하려고 했지만, 결국 서양인들의 폭로로 일본의 만행은 세상에 알려집니다.6)


을미사변 이후 일본은 조선에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감정이 극도로 높아진 상황에도 불구하고 친일 내각은 단발령, 태양력 사용 등을 추진합니다.


이때 고종은 친일 내각에서 안정을 찾을 수 없었고, 공포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종의 부탁을 받은 미국 선교사들은 두 사람씩 대궐에 가서 임금의 곁을 7주간 지키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고종의 첫 번째 탈출 시도가 춘생문 사건이었습니다. 고종은 이때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고 했으나 왕궁 경비를 맡던 중앙군 대대장의 배반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춘생문 사건의 실패를 반긴 것은 일본이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던 재판에서 일본은 을미사변 관련자 전원을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합니다. 그리고 메이지천황은 을미사변을 진두지휘한 일본 공사가 석방되자 그 노고를 치하하기까지 합니다.7)


정치적 상황은 고종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고종은 두 번째 탈출을 시도하여 성공합니다. 이것이 1896년에 있었던 아관파천(아관은 러시아공사관, 파천은 임금의 피란을 의미)입니다.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이제 친일 정부 대신들을 잡아 죽이라고 지시합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며 러시아공사관 앞에 대포까지 배치하였지만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한 각부 대신들은 러시아공사관 내의 임시 사무실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대신들은 국사를 논의할 때 러시아 공사와 논의하는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8)


목숨을 위협받던 개인의 관점에서는 아관파천을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왕이 자국 영토 안에 있는 외국 공사관에 몸을 피신한 굴욕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에 허가 찔린 일본은 크게 분노하며 러시아와의 결전을 위해 향후 10년간 군비확장 계획을 추진합니다. 반면 아관파천 당시 조선 정부의 정책 수준은 을미개혁에서 추진했던 단발령을 철회하고 러시아와 미국에 각종 이권을 남발하는 것이었습니다.9)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이 필요했지만, 여전히 왕 한 명의 의지에 따라 국가 방책은 수시로 바뀌었고, 제국주의 열강은 조선의 상황을 기회로 생각하고 이권 획득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고국에 돌아온 청년 서재필이 마주한 것은 갑신정변 당시보다 더 절망적인 현실이었습니다.



1)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1, 국사편찬위원회, 2002, 32-33쪽
2)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1, 국사편찬위원회, 2002, 38쪽
3) 김영수, 「세레진 사바찐의 하루 : 을미사변에 관한 기억과 선택」,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2010.5, 335-336쪽
4)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41, 국사편찬위원회, 2002, 36쪽
5)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2, 인물과사상사, 2007, 287·295-296쪽
김영수, 「세레진 사바찐의 하루 : 을미사변에 관한 기억과 선택」,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2010.5, 337쪽
「우범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6) 「을미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7)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2, 인물과사상사, 2007, 315-318쪽
8)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3, 인물과사상사, 2007, 11·16쪽
9)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3, 인물과사상사, 2007,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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