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서재필, #036 과거합격, 서재필의 사람들,유학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by 연결고리


청년 시절 읽기



#036 과거합격, 서재필의 사람들, 일본 유학



서재필은 안동 김씨 출신의 양어머니 가문에서 성장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교서관(책을 제작하거나 축하전문을 보내는 일 등을 하는 기관)의 관리로 임명됩니다.


고종대에는 이전 시기보다 워낙 과거가 많이 시행되어, 서재필이 과거에 합격한 그해에만 국가 경사 등을 이유로 무려 4회의 특별시험을 실시합니다. 이들 시험은 3년마다 실시하는 정기시험의 까다로운 절차와는 달리 한 번의 시험으로 합격자가 결정되는 시험이었습니다.1) 다시 말해 합격자 수가 많아지는 시기이고, 과거와 관련된 부정행위도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과거 합격이 서재필의 진짜 실력인지, 운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끌어주는 누군가에 의해 합격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최연소 합격은 가문의 자랑으로 여길만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자신만의 힘으로 13~14세에 장원급제해 주위로부터 칭찬과 부러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합격 당시 연령과 장원급제 사실 모두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단순한 착오라기보다 서재필이 입신출세에 강한 의지를 가진 증거로 보기도 합니다.2)


80대의 노인도 과거 합격이라는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대에 세도 가문의 후원 속에 최연소 과거 합격을 이룬 청년 서재필은 보통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출세를 위해 더 노력할 필요도 없었고, 현재 상황에 안주한다고 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대 개혁’이라는 어려운 도전을 선택합니다. 여기에는 그의 의지가 가장 중요했겠지만, 오경석·유홍기·박규수가 키운 북촌 양반 자제들과의 교류가 큰 영향을 미칩니다.


서재필의 옆집은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이 살았고, 조금 걸어 내려가면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 인물들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글공부와 놀이를 즐기며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서재필·김옥균·박영효 등은 훗날 갑신정변을 함께 도모하였고, 정변이 실패한 이후 이들은 갑신오적이라는 반역죄인으로 불리며 함께 고난을 겪습니다.3) 오경석에게 유홍기·박규수가 있었던 것처럼 시대에 도전하는 청년 서재필에게도 이들 공동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리더는 서재필보다 13살 많은 김옥균이었습니다. 그는 안동 김씨 세도가 출신으로 이미 과거에 합격하여 고종의 관심을 받고 있었으며, 서재필이 과거에 합격하기 1년 전에 고종의 허락을 얻어 직접 일본을 시찰하고 올 정도로 개화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습니다.4)


서재필보다 3살 많은 박영효는 이들 중 신분이 가장 높았습니다. 그는 철종의 딸과 결혼하여 왕의 부마가 되었고, 서재필이 과거에 합격할 당시 겨우 20대의 나이로 판의금부사(반역죄 등 임금의 명령을 받아 중죄인을 심문하는 일을 맡는 의금부 최고의 관직으로 종1품)에 임명된 최고의 양반이었습니다.5)


이렇게 최고의 지위를 누린 청년들이 개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의 장래가 그저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청년 서재필은 자신을 뒷받침해주는 든든한 청년들의 후원 속에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그들과 함께 권력의 핵심에서 개혁을 도모했기 때문에 그는 청년 오경석이 느꼈던 신분적 좌절감과는 다른, 희망과 가능성을 보았을 것입니다.


서재필이 과거에 합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오군란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청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고, 조선에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합니다. 임오군란이 진압되자 박영효는 사건 과정에서 일본교관이 살해당하고, 일본공사관이 공격받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전권대신(나라의 권한을 위임받은 외교사절)이 되어 일본에 파견됩니다. 이때 박영효는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 세력과 동행하는데 이들은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정계의 지도자 및 구미 외교 사절들과 접촉하며 일본의 ‘개화사상’을 수용하게 됩니다.6) 이것은 앞으로 청의 정치적 간섭에 반감을 갖게 될 급진개화파들이 개혁의 과정에서 일본에 접근하게 되는 출발점이 되며, 서재필 역시 이런 시대적 상황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옥균은 국방 문제의 시급성을 인식하여 서재필에게 군사유학을 권유하게 되는데, 서재필은 김옥균의 요구에 응하여 바로 일본으로 떠납니다. 이때가 관직 생활 2년 차, 겨우 20세의 나이였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그는 처음 6개월간 후쿠자와 유키치가 경영하는 게이오 의숙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운 후 도쿄에 있는 일본 육군학교에 입학하여 13개월간 교육을 받습니다.7)


서재필이 일본 유학 기간에 받은 사상적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전근대의 에도막부와 메이지유신의 개혁기를 거친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 사상가로 현재 일본 최고 고액권인 1만 엔 지폐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에도막부가 네덜란드와 교류하던 시기, 난학이라고 불리던 네덜란드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미국에 의해 일본이 개항된 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서양의 상황을 직접 체험합니다.


미국에서 그는 대통령의 후손이라고 해서 특별히 존경을 받거나 권력을 위임받는 일이 없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현재도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여러 대에 걸쳐 정치인을 배출하는 세습 정치를 하고 있는데 그 당시 미국에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느낀 충격은 정말 대단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영어로 된 서적을 구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 규모가 커지자 게이오 의숙(현재 도쿄에 있는 사립종합대학)을 만들게 됩니다.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로는 강화도조약 체결 1년 전에 저술한 『문명론의 개략』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당대 베스트셀러가 되어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는데, 주장의 핵심은 ‘일본이 서양과 같은 수준의 문명을 이루어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양의 문화와 풍속을 전면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이러한 일본의 개화사상을 ‘문명개화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사고는 미개한 아시아와 결별하고 서양 열강과 이웃해야 한다는 탈아론(脫亞論)으로 발전하여 아시아 멸시의 사상적 바탕이 됩니다.


앞에서 문명의 기준으로만 각 문화권을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면 안 된다고 했는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이 가장 낙후된 나라, 중국과 일본은 중간 정도 낙후된 나라로 평가했으며, 이들 나라는 모두 서양 문명의 길을 걸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사상이자 일본이 추구한 개혁의 방향이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을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나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이 사건은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간 일본의 승리이며, 이를 계기로 드디어 일본이 조선을 지도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고 평가했습니다.8)


김옥균은 일본 방문 당시 이런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 사상을 접했고,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정변 실패 후에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이때 김옥균을 환대한 사람은 후쿠자와 유키치였습니다.9)


급진개화파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론에 큰 영향을 받게 되자 급진개화파 역시 외국인의 시선으로 조선을 인식하게 됩니다. 김옥균이 쓴 다음의 글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선은 산천은 아름다우나 사람이 적어 부강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사람과 짐승의 똥오줌이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더렵다’라고 한다. 이것이 어찌 차마 들을 말이냐.”10)


개혁의 의지가 불탔던 청년들은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난 후 일본이 서양을 동경하듯 일본을 본받고 싶어 했을까요? 그리고 일본을 방문한 선배들로부터 일본의 변화상을 듣다가 직접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교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은 20세의 서재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멋모르는 대학 신입생 시절,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고등학생 때는 알지 못했던 심오한 학문의 깊이를 경험하며 비판 없이 강의를 수용했던 경험이 한 번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신분적 서열을 강조하고 스승을 존경하던 유교 시대에, 일본을 선망하는 선배들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변화를 직접 눈으로 목격한 젊은 서재필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문명개화론은 발전된 문명국가를 우상화하므로 기술 발전의 우월함으로 힘없는 상대를 억압할 수 있다는 논리로 쉽게 발전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의도를 내포하고 있기에 결론적으로 이런 사상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서양과 같이 ‘힘’을 길러야 한다는 논리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서양 열강이 폭력적으로 무력을 휘두르는 상황에서 힘이 없으면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힘을 기르기에 앞서,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이끄는 ‘가치철학’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어떤 삶을 살겠다는 가치철학을 정립하지 않고 무턱대고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자 하면 결국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누군가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만 남기 마련입니다. 서양은 그것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기른 후, 그것을 남용한 것이고,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인종주의나 사회진화론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범죄를 오히려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약 경륜을 갖춘 누군가가 문명개화론의 문제를 검토하고 급진개화파를 좀 더 옳은 길로 이끌어주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런 이유로 변화를 추구하는 청년일수록 ‘실력지상주의’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경험이 부족한 청년일수록 상황에 더욱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9세의 서재필은 9품이라는 낮은 직위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일본 유학으로 1년 반을 보냈고, 귀국 후 정부의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겨우 5개월 만에 갑신정변에 참여합니다.


일본에서의 경험을 반성할 겨를도 없이 서재필의 사고는 이미 개혁의 당위성에 치우쳐져 있었고,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거나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서재필은 큰 사건을 앞에 두고 분명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숙고’의 기간은 짧았고, 그것은 ‘놓치고 있는 가치’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는 개혁의 성공 가능성에 치중한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서재필은 나라를 개혁하려는 애타는 마음을 갖고 행동했지만, 청년의 미숙함을 지닌 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합니다.



1) 정지연, 「고종대 문과정시 운영 연구」, 『교육사학연구』 31, 교육사학회, 2021.4, 115쪽
2) 박성진, 「서재필과 이승만의 만남과 갈등 ―개화기, 독립운동기, 해방정국기를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67,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9, 599쪽
3) 함규진, 「김옥균 : 한 떨기 벚꽃처럼, 지사의 길을 가다」, 『인물과 사상』, 인물과 사상사, 2015.05, 114쪽
4) 「김옥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5) 「박영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6) 「박영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7) 서재필기념회, 『선구자 서재필』, 기파랑, 2011, 21쪽
8) 김도형,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 인물』, 세손출판사, 네이버 지식백과
9)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8, 국사편찬위원회, 2002, 93쪽
함규진, 「김옥균 : 한 떨기 벚꽃처럼, 지사의 길을 가다」, 『인물과 사상』, 인물과 사상사, 2015.05, 126쪽
10) 함규진, 「김옥균 : 한 떨기 벚꽃처럼, 지사의 길을 가다」, 『인물과 사상』, 인물과 사상사, 2015.05,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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