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서재필, #035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의 수립

제자에게 들려주는 청년의 역사2

by 연결고리

시대 읽기


#035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의 수립



아관파천의 암울한 상황에서 정치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1896년 설립된 독립협회입니다. 이것은 민간의 개화파 인사들과 정부의 고위 대신들이 함께 참여하여 자주 국권·자유 민권·자강 개혁 운동을 전개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입니다.1)


독립협회는 그동안 정부가 하지 못한 다양한 활동을 추진합니다. 조선의 왕이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설합니다. 그리고 고종에게는 러시아공사관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여 환궁도 이뤄집니다. 대한제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국정개혁안을 결의하기 위해 정부 관료와 함께 관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의회의 성격을 갖는 중추원 관제가 발표되도록 정부에 제안도 합니다. 이뿐 아니라 열강의 이권 침탈도 비판합니다.


특히 계몽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고,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반 민중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도로 보수, 가로등 시설, 광산 개발, 의약학 공부, 전기 사용 문제 등과 같이 개화 문명의 흥미로운 내용부터 교육, 국문 사용, 노비제 폐지 등과 같이 개화 정책 운용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다양한 이슈2)에 관한 토론을 직접 경험하게 된 상황은 전근대시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급진적인 변화였습니다. 이런 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 이어졌고, 이전에 왕 앞에서 절대복종했던 백성들의 태도 변화에 지배층의 위기의식은 점차 높아집니다.


그런데 독립협회 활동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그들은 불합리한 군주권 자체에는 도전하지 않았고, 러시아의 이권 침탈에 반발한 반면 일본의 경인선 부설은 환영하고, 미국의 운산 금광 채굴권에는 문제 제기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가 경부선 부설권 확보를 위해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 독립협회는 그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 기사를 실었고, 독립협회 회장은 독립문 모양의 은종을 만들어 그에게 증정하였습니다. 이것은 독립협회가 당시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는 이 시기 유일한 근대적 개혁 단체였고, 민중에게 국권과 민권을 수호할 수 있도록 안내했던 단체였기 때문에 이 단체의 활동이 계속 보장되었다면 군주권을 비판하거나 일본의 침략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1900년대 이르러서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에 반대하는 단체들이 많이 등장하고, 더 나아가 공화정을 목표로 하는 최대 비밀 항일 결사인 신민회도 조직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 단체의 뿌리는 독립협회였습니다.


처음에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많은 사람이 나라의 각종 사안을 확인하고 검토하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다면 분명 시대의 문제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비판의 목소리를 겸허히 수용한다면 개혁은 아마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 사회가 지닌 매력이자 가치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종은 변화를 수용하지 않고, 전제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근대적 개혁을 거부합니다.


독립신문을 통해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정부는 독립협회 회장으로 있었던 이완용을 좌천시키면서 독립협회를 압박했고, 이를 계기로 관리 출신의 회원들은 독립협회를 탈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권 침탈이나 조약 체결 등 외국과 관련된 사안은 중추원의 의장이 각부 대신과 함께 서명해야 한다’는 관민공동회의 합의 사항을 정부가 실행에 옮기지 않자 독립협회는 정부의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부를 더욱 거세게 비판합니다. 이에 수구파 관리들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무고하게 되고, 독립협회는 결국 강제 해산당합니다.4) 이것이 전제왕권을 버릴 수 없었던 고종과 보수파 관료들의 시대적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협회의 건의에 따라 환궁한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합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은 황제가 되었고, 모든 권력은 황제에게 집중됩니다.


그동안 조선에서의 개혁 실패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고한다)’이라는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황제권에 도전한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독립신문을 폐간시킵니다.


이렇게 시대에 역행하는 정치적 행위로 대한제국은 더 이상의 근본적인 개혁을 진행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후 최종적으로 국권을 강탈당합니다.


강화도조약 이후 1880년대 정부의 개화 정책을 거쳐 1890년대 대한제국의 수립까지, 서양의 약탈적 제국주의 정책을 답습한 일본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한 반면, 조선은 20여 년의 기간 동안 누적된 부정부패를 일소하지 못했고, 외세의 정치적 간섭 속에 위협을 느끼다가 최종적으로는 전제왕권을 다시 강화시켜 시대에 역행하는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이 너무 암울하기 때문에 청년 서재필은 처음부터 시대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던 실패한 존재라고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병인양요 당시보다,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보다, 갑신정변 당시보다, 갑오개혁 당시보다, 독립협회 시기의 역사는 더욱 진보했습니다. 개혁은 단지 쉽고 빠르게 이뤄지지 않을 뿐, 청년의 도전은 변화를 앞당겼고, 세상은 청년의 도전을 계승하여 변화를 완성하게 됩니다. 이제 청년 서재필의 도전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 「독립협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2) 이황직, 「근대 한국의 초기 공론장 형성 및 변화에 관한 연구 : 협성회와 독립협회의 토론회를 중심으로」, 『사회이론』, 한국사회이론학회, 2007.12, 79쪽
3) 주진오, 「사회사상사적 독립협회 연구의 확립과 문제점 : 신용하, 『독립협회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149, 한국사연구회, 200.6, 341·344쪽
4) 「독립협회」,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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