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삶이란 것이구나.
그때 제 마음에는 불행이라는 것의 정체가 비쳤습니다.
아아, 이것이 불행이라는 것이구나.
저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중에서.
사는 게 너무 무겁다. 무섭다.
또 살아가야 할 내일이, 살기 위해 내야 할 돈이, 돈을 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삶이라는 존재가 내 어깨를 누른다.
그러나 그게 삶의 본질이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럭저럭 하루를 살다가, 문득 어느 날 옥상에 서면 저 아래로 뛰어내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불행의 그림자가 평생을 따라다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생이라는 빛이 있어서가 아닐까.”
“불행을 종식하기 위해선 빛이 사라지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추운 겨울 따스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스스로 기찻길로 들어서고 마는 무책임한 죽음과,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이 있다.
도무지 당신이 없는 도시에서 살 자신이 없어 도망쳐야 했던 ‘내’가 있다.
이 소설을 알게 된 건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였다. 아내가 스스로 생을 끝낸 당신(남편)에게 아주 담담하게 말을 거는 첫머리의 소개를 읽는 순간, 나는 이 글이 산 자의 유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이유도, 단서도 없이 죽어 버린 당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가끔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나와, 이토록 아름답고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살고, 그런대로 살 만하다고 느끼는 나를 때때로 견딜 수 없는 날들이 뭉툭한
연필로 적혀 있었다.
아무리 이유를 찾으려고 애써도 선명히 알 수 없는, 실종과도 같은 당신의 죽음 앞에서 나는 어제를, 오늘을, 내일을 살아내지만, 당신에게 말을 거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크게 불행하지 않고, 가끔은 부서지는 저 먼바다의 빛을 바라볼 수 있는 삶 속에서 당신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은 이처럼 지독하게 춥고 가난한 세상일지라도 당신이 살아 있길 바라서. 이 추운 세상에서 실종된 당신이 따뜻한 곳에 안도하였는지 알 수 없어서.
단지 그뿐임을 알고 있다.
내가 이 소설에서 읽어낸 것은 죽은 자의 마음이 아니었다. 죽은 전남편과, 재혼한 남편의 등 뒤에 어른거리는 영원한 불행의 정체를 나는 알고 싶지 않다. 그저 파도의 포말처럼 사라져 죽고 싶은 지난한 삶을 몰라서가 아니다. 원한 적 없이 주어진 삶이 주는 깊은 피로감을 너무도 잘 알아서, 그리고 남겨진 자의 영원한 의문 역시 선명하게 알고 있어서였다.
나 역시 같은 고통을 끌어안고서 매일 물어야 했다.
왜 그랬어야 했는지.
꼭 그랬어야 했는지.
끝을 낼 만큼 시리고 아팠는지,
나의 존재가 당신에게는 아무 위로도 되지 않았는지.
불행의 그림자가 끝내 당신을 잡아먹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지.
나를 원망하다가, 너를 미워하다가, 소설의 한 문장처럼 “그 분함과 슬픔으로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럼에도 내가 너에게 끝없이 말을 거는 이유는, 우리는, 그러니까 빛 속에 남겨진 자는 살아가야 하니까.
빛으로, 빛으로 걸어가야 하니까.
당신을 잃어버린 슬픔은 저 자신조차 몸이 떨릴 정도로 이상한 것으로, 그것은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억측이 미치지 못하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분함과 슬픔이 가슴속에 서리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함과 슬픔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