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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Nov 09. 2023

나에게 지지 않으려 읽고 쓴다.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를 읽고

어느 가을날. 뜨거운 햇볕과 등으로 흐르는 땀에서 느껴지는 계절은 절대 가을일 수 없는 날이라 생각하며 며칠째 머릿속에서 덜커덕거리며 나를 고민하게 했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시장을 돌아다녔다.


분명 집에서 나설 때는 쌀쌀해 제법 두꺼운 옷으로 입었는데 시장 몇 곳을 돌았을 뿐인데 등과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든든했던 달력이 이제 겨우 두장만으로 버티고 있는 11월인데 원래 이렇게 더웠던가. 마음은 급해 발은 바쁘게 걷고 있지만 머리는 곰곰이 생각해 빠졌다. 생각이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 후다닥 건져 올려져 '11월 날씨 치고는 너무 덮다.'였다.


멀리 보이는 산과 가로수의 울긋불긋 물든 단풍을 보면 가을이 분명한데 따가운 한낮은 봄이 여름으로 달리고 있는 느낌 같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해결을 위해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당장 다음날 결혼식에 참석해야 했다. 며칠째 하루가 멀다 하고 옷장을 뒤져봐도 입을만한 마땅한 옷이 없다. 너무 오랫동안 격식에 맞는 옷을 입을 일이 없었고 그 시간 꾸준히 몸의 평수를 늘려 항상 몸을 가리는 옷만 샀다. 옷장 안에 있는 옷으로 이리저리 맞춰 입어보지만 끝내 겉옷을 하나 구입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여유 있게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었다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비교하고 괜찮은 옷으로 구입할 수 있었을 테다. 성격상 늘 오랜 고민에 빠져 실행에 옮기기는 미적거리다 낭패를 봤다. 대체로 돈은 돈대로 쓰고도 마음에 드는 것을 사지 못했다. 역시나 이번도 마찬가지가 될 것 같아 옷 가게를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불현듯 이날 새벽에 읽은 정희진 작가의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책 내용이 떠올랐다.

나는 냉장고, 화장품, 핸드폰, 드라이기, 다리미, 자동차, 샴푸, 냉난방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의류, 신발도 구입하지 않는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최대한 축소된 삶을 살고 싶다.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 이런 생활 습관이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아니 아예 믿지 않는 독제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서다.


작가는 철학은 없어나 저항의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에 비해 나는 저항은 없지만 나만의 개똥 같은 철학으로 이런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자주 잊는다. 깨어 있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스스로 많은 내적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배터리용량이 적어 자주 꺼진다.


다행히도 네 번째 옷 가게에서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알아챘다. 당장 머릿속 옷장을 뒤져 예쁘고 새 옷 같지 않지만 깔끔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찾아냈다. 이만하면 됐다. 여기서 나를 멈추게 한 책 속 저자의 말은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나의 의지와 철학을 단숨에 건져내줬다.


나는 나에게 지지 않으려고 읽고 쓴다. 인생의 여러 갈래 길 위에서 내가 정한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책 속 말들을 등불 삼아 걷고 있다. 내 안의 작은 욕망에도 쉽게 꺼질 수 있지만 책 속 밝은 곳만 찾다 보면 쉽게 어둠에 지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런 든든한 마음이 오늘도 나를 읽고 쓰기는 사람으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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